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16

상 상 2014. 8. 27. 18:10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16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설인귀의 편지와 (문무)대왕의 답서(2)

대왕이 답서에서 일러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 22(648)에 입조(入朝)하여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玉帛]와 사람들은 나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기일을 정해주셨습니다.

 

신라 백성들이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문제(文帝:당태종)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셔서[踐祚]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으셨는데, 인자한 베푸심을 자주 입어 지난날보다 정도가 더하였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금인(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니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일이오라 몸이 바스러지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부리시는데 쓸모가 되기를 바랬으며, 간과 뇌를 땅에 발라서라도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현경 5(660)에 이르러 성상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마저 이루어지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 남겨둔 사업을 이루고자 하여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끄실 수 없었으나,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셔서 억지로 국경까지 나가 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가 서로 호응하고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적의 큰 부대를 격파하고

양군이 같이 [백제] 왕도에 도착하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선왕께서는 대총관 소정방과 함께 상의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역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후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웅진]부성(府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웅진)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에워싸 지키니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서로 바꿔 잡아먹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현경] 6(661)에 이르러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므로, 웅진의 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공격하러 갔다가 적에게 격파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싸움에 패한 이후 웅진에서 군사를 청함이 밤낮 계속되었는데,

때마침 신라에는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청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러 갔으나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달려와 공격하여 많은 군사와 말을 잃고 이득없이 돌아오게 되니, 남쪽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웅진부성을 에워싸니 이로써 웅진은 길이 끊겨서 성 안에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그 곤경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6월에 이르러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의식은 겨우 끝났으나 상복을 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구원 요청에] 응하여 달려갈 수 없었는데,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총관 유덕민 등이 와서 칙명을 받든 바,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나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웅진부성이 고립되어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의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이 마침내 저와 함께 동행하여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쳐서 곧 옹산을 함락시키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의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명을 어기게 될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늙고 약한 자를 시켜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도중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00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 2(662) 정월에 이르러 유총관은 신라의 양하도(兩河道)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눈보라가 치고 날씨가

몹시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다는 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였고 신라 군사도 양식이 다 떨어졌으므로 역시 군사를 돌렸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하여 길에서 죽은 사람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마자 적의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사들이 집에 돌아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부성에서 자주 곡식을 요구하였는데,

전후로 보낸 것이 수만 섬에 달하였습니다.

남으로는 웅진으로 [식량을]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다 써버려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웅진의 중국 군사는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헤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는 백성들에게 할당하여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늘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그 때마다 항상 신라가 구원하여 풀어주었습니다.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 이하 군사 모두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은혜가 비록 끝이 없다 하지만 신라에서 충성을 바친 것 또한 가엽게 여길 만한 것입니다.

 

용삭 3(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부성(府城)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 군사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와, 왜의 배 1천 척은 백강(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지를 깨뜨리니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져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 하나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으나, 그들이 굳게 지키고 반항하였으므로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대부(杜大夫)칙명에 의거하면 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으니,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라가 생각하기에,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이후에 서로 함께 회맹(會盟)하라고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고

또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한이 없고 이랬다 저랬다 함이 무상하니

지금 비록 함께 맹약을 맺는다 하여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 걱정이 생길 것이라 하여

맹약 맺는 일을 중지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