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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 원년(664)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회맹한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이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취리산(就利山)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을 상대로 피를 마시고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기 생업을 꾸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건봉 2년(667)에 이르러 대총관 영국공(英國公:이세적)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를 국경으로 보내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쳐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정탐이 돌아와 모두 말하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세적)의 사인(使人)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군사는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 군량을 공급하고 와서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군사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건봉 3년(668)에 이르러 대감 김보가(金寶嘉)를 보내 바닷길로 들어가
영공(英公:이세적)의 분부를 받아오게 하였더니,
신라 군사는 평양으로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받아왔습니다.
5월에 유 우상(劉右相: 유인궤)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는데
나도 또한 한성주에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습니다.
이때 번방(蕃方)의 군사와 중국의 여러 군대가 사수(蛇水)에 모두 모여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결판내려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영공(이세적)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00명을 뽑아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평정하고 큰 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군사는 모두 ‘정벌을 시작한 이래 이미 9년이 지나 인력이 다할 대로 다하였지만
끝내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두고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반드시 우리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한 은택을 입을 것이요, 인민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공(이세적)이 넌지시 말하기를
‘신라는 전에 군대 동원기일을 어겼으니 모름지기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두려움이 더했습니다.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는데,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곧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고 하여
군장(軍將)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겨 살게 하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었지만 끝내 반역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 원년(668)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나라 안에 감추고는
번번이 찾아도 끝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소식을 들으니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였습니다.
또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한성 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보내고
그와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를 목베고 꾀하였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형(咸亨) 원년(670)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모여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이 여기에 와서 함께 의논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이후에 피차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을 서로 바꾸어서 볼모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장귀(首彌長貴) 등을 보내
웅진부로 향하게 하여 볼모 교환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볼모 교환을 승낙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여
밤이 되면 와서 공격하곤 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펴서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 한 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니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런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는 바람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반역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당나라] 고관[貴臣]의 뜻을 잃었고 후에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소가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도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인(使人) 임윤(琳潤)이 영광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이르러서야 총관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쇠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여야 할 것이나,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사는 까닭에 예를 드리지 못하고 제때에 미처 영접을 못하였으니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관이 보내온 편지를 펴서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반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래 마음이 아니어서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공로를 스스로 헤아린다면 욕된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다물고 책망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지금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간략히 진술하고 반역한 사실이 없음을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일의 근본과 사유를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수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 하여
누선(樓船)들이 푸른 바다에 가득하고 배들이 잇대어 강어귀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을 생각하여 저희 신라를 공격하시는 것입니까?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당하더니
들에 짐승이 없어지자 요리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賞)을 받고
중국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비록 그 빛을 비춰주지 않으나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께서는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타고났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자질을 품고 있으며
일곱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고 아홉 가지 학문을 섭렵하셨으니, 황제의 책벌을 삼가 집행함에 있어
죄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벌을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키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이유를 묻는 서신을 보내왔으니,
이에 반역하지 않았음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리셔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이 사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