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55, 당나라때-79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끝)

상 상 2014. 7. 18. 18:10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55, 당나라때-79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

4. 구당서 태종본기()

5. 구당서 고종본기()

6. 구당서 고종본기()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29(618) 4월에 이연은 당나라를 건국한다.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였을 때 당나라는 돌궐의 속국이었다.

이것은 당고조 이연이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이지 돌궐이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힘이 약한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기 위해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면서 일어난 일이고

돌궐의 백만 대병과 이연의 3만 군사에서 보듯이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고조 이연은스스로 돌궐의 가한에게 신하라고 칭하였으며, 해마다 막대한 공물도 바쳤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위는 당태종이 제위에 오른 후 3(정관 3)까지 지속되었다.

 

그때까지 당태종은 감히 돌궐을 공격할 생각도 못하였다.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 두명의 가한이 서로 싸우고 패배한 쪽에서 이탈자가 생겨 당에 군사를 요청하자

그때야 당태종은 군사를 보낸다. 그만큼 당태종은 돌궐을 두려워 하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돌궐을 멸망시킨다.

한마디로 돌궐은 내분으로 망한 것이다. 강성한 돌궐이 내분만 없었으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당나라의 움직임을 보면 강성한 나라에 대해서는 내분이 일어나야 침략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그 전까지는 두려워서 꼼짝도 못하다가 상대방이 내분을 일으켜 힘이 없어진 것을 보고서야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꼼짝 못하다가 상대방이 스스로 쓰러진 뒤에 때리는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힘이 있으면 비굴한 자세로 막대한 양의 보물과 물품을 계속 바쳐 종놈 노릇을 하다가

상대방이 스스로 넘어지면 그 위에 올라타 뺨을 때리고 등에 칼을 꽂는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돌궐처럼 평소에는 두려워서 꼼짝 못하다가 내분이 일어나자 당태종이 군대를 동원해 침략한 나라가

또하나 있다. 바로 고구려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고구려의 강성함이다.

 

고구려도 돌궐과 마찬가지로 당태종이 평소에는 두려워서 감히 공격할 생각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의 정변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내분으로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태종이 607년 돌궐을 무너뜨리고 토욕혼을 635년에 속국으로 만든 뒤에도 고구려에게는 10년 동안 감히

공격할 생각도 못하였다. 돌궐 멸망 후 12년 뒤인 642년 연개소문에 의한 고구려 정변이 일어나자,

그것을 고구려 내분으로 생각하고 다시 2년 뒤인 64411월에 고구려 침략을 한다.

 

이렇듯 고구려도 돌궐처럼 강성하였기 때문에 당태종이 평소에는 감히 공격할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도 돌궐처럼 내분이 일어나자 당태종은 고구려를 돌궐처럼 이길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당태종

스스로 직접 군대를 끌고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돌궐보다 더 강성하여 당태종은 요동성쪽에서 맴돌다가 안시성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고 비참하게 쫒겨난다.

쫒겨나는 길에는 그 혹독한 만주벌판의 눈보라를 맨살로 맞아가며 비참한 몰골로 겨우 빠져 나갔다.

그리고 끝내 고구려 침략 때 당한 부상으로 숨지고 만다

 

이렇듯이 고구려는 당태종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돌궐보다도 훨씬 더 강성하였던 것이다.

(돌궐은 패했으나 고구려는 승리하였음)

 

이만큼 고구려는 이때 천하무적이었던 것이다

 

정작 고구려가 망한 것은 돌궐과 마찬가지로 내분 때문이었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때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과 그 동생 남건· 남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뒤이어 결국 남생이 쫒겨나 남생의 아들 헌성이 당에 들어가 구원을 요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내분이 외세를 불러온 돌궐의 경우와 완전히 똑같아 진 것이다.

 

이렇게 되어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남생이 당나라군을 끌고 조국 고구려로 쳐들어 오는 바람에

고구려는 망하게 된다.

 

이렇게 고구려는 내분에 의해 망한 것이지 고구려가 힘이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 당나라가 고구려보다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분이 있기 전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이 다 실패하였음이 이를 증명한다.

 

다시말해서 고구려의 내분이 있기 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고구려가 상위에 당나라가 하위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신구당서를 검토해 보자.

 

구당서 동이열전 등에 의하면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무덕 2(619)부터 시작된다.

그에 의하면무덕 2,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당나라) 조정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당나라는 장안 지방만 차지하고 있었을 뿐, 낙양 등 그외 중국의 모든 지역은 왕세충, 두건덕, 이자통, 유무주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북쪽에 강대한 돌궐이 있었다.

한마디로 중국은 온통 전쟁을 하고 있었던 때이며, 당나라(장안)의 동서남북이 다 막혀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고구려의 외교사절(사신)이 장안(당나라)을 방문했다면

그것은 그 당시 고구려가 엄청난 강대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 4(621)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록은 

신당서 동이열전 무덕 4사신을 보내 조정에 들어왔다(遣使入朝)는 기록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때는 비록 당나라가 낙양까지 차지하였지만 당나라 자신도 돌궐에 칭신납공 하던 처지이며

하북마저 아직 평정하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 다음,

구당서 고조본기 무덕 7(624) 정월 조에 있는 고려왕 고무를 요동군왕으로 봉하였다.는 것 역시

신당서 동이열전에 있는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하였다. 는 기록이 사실이다.(동등한 지위를 표시하는 것임)

 

그 이유는

첫째, 그 당시 당나라는 돌궐에 억눌려 돌궐의 신하 노릇하던 때라 다른 나라 임금을 책봉할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고구려는 한번도 돌궐에 굴복한 일이 없는 돌궐과 대등한 국가이고 당나라는 그때 돌궐의 종속국가였기 때문에

         돌궐의 종속국가인 당나라가 돌궐과 대등한 고구려를 책봉할 수 없었다는 점.

셋째, 고구려는 그 당시 당나라가 군왕(郡王)에 책봉했다는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

넷째, 당나라가 돌궐을 무너뜨리고도 10년 동안이나 감히 고구려를 침략할 생각도 못하고

         고구려에 내분이 일어나야 고구려 공격을 생각할 만큼 고구려가 강성했다는 점.

다섯째,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 5(622)의 글을 보면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서로 대등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

여섯째,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 7(624) 아래 나오는 글에 당고조가 고구려에게 칭신하게 할 마음이 없고

            고구려를 수나라와 동등하게 대하겠다고 말한 점 등이다.

 

그 다음, 구당서 동이열전 정관 17(643) 기사

그 사왕(嗣王) ()을 책봉하여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삼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사 ()을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하였다.는 기록이 맞다.(고구려와 당나라의 동등한 지위를 표시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