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1

상 상 2014. 7. 21. 17:39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1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 들어가는 글 >

 

고구려 몰락 후에는 우리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고구려 이후의 우리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가 살펴봐야 할 사항은 많지만

이번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사항은 평양 함락 후의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사항 다음과 같다.

 

첫째, 평양 함락후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구당서 고종본기에 의하면 평양이 함락된 때는 668(총장 원년) 9월이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그해(668) 12월이다.(삼국사기, 구당서 지리지)

 

그런데 신구당서 지리지에 의하면,

676(상원3) 2안동도호부를 요동군 옛 성으로 옮겼다가,

677(의봉2) 2또 신성으로 옮기고,

714(개원2) 다시 (안동도호부를) 평주로 옮겼으며,(발해 건국)

743(천보2) (안동도호부를) 옛 요서군의 성에 옮겼다가,(?)

결국 지덕(756~758) 후에 (안동도호부를) 폐지하였다.(안록산의 난 발발 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특히 66812월에서 6772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신성으로 옮겼을까?

 

 

둘째,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신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상원2(675) 2월에 []인궤가 칠중성에서 그들(신라 군사)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오랑캐(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문무왕)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신라에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로 ()법민(문무왕)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라고 된 이후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기록이 없어졌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이 끝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나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이 사죄하고 공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와서 용서를 빌어 신라를 용서하였고 그래서 신라는 살아남았으며, 따라서 신라는 당나라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살았으니 당나라의 신하가 되었는가? 중국의 사서를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우선 이 두가지 사항에 대하여 무엇이 사실인지 낱낱이 살펴보기로 할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사서는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본기와 고구려 부흥운동

구당서 고종 본기

신당서 고종 본기

신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신구당서 동이열전 신라편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등 이다.

 

이중에서 , , 번은 이미 올린 것이 있고,

번은 고구려 몰락까지만 올렸으며,

번은 고구려 몰락과 그 이후를 조금 더 올렸고

번은 올린 것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번역본이 없는 신구당서 고종 본기를 필자가 직접 번역하여 올리고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도 고구려 몰락 부분부터 그 이후로 최소한만 복사하여 올리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