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50, 당나라때-74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③)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③
셋째, 정관 17년(643년) 기사에 대하여:
구당서 동이열전: 정관 17년(643년)에 그 뒤를 이은 왕, 장(藏)을 봉하여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삼았다. (十七年,封其嗣王藏為遼東郡王、高麗王) :
신당서 동이열전: 황제(당태종)은 상(喪)을 기회로 하여 남을 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장(藏)을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拜)하였다.(帝不欲因喪伐罪,乃拜藏為遼東郡王、高麗王)
⇒ 구당서는 봉(封)하였다고 하고, 산당서는 배(拜)하였다고 한다. 역시 봉(封)은 하위를 말하고 배(拜)는 동등 지위를 말한다.
우선 이러한 기록은 구당서 태종 본기는 물론 신당서 태종 본기에도 없다. 그리고, 당태종은 임금으로 모셨던 최강대국 돌궐이 내분이 나기 전까지는 감히 돌궐에 대적할 생각도 못했다. 그러한 돌궐이 두명의 가한(可汗: 칸)이 서로 싸우는 내분이 일어나자 군대를 투입하여 성과를 내자 그 다음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돌궐을 멸하였다. 그것이 정관4년(630년)이다. 이렇게 당태종은 강대국에 대하여 감히 적대행위를 못하다가 그 나라에서 내분이 일어나야 군대를 동원하는 수법을 썼다. 이렇게 내분이 일어나기 전에는 감히 적대행위를 못한 나라가 또하나 있으니 바로 고구려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돌궐만큼 무시무시했던 강대국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신당서 동이열전에 『정관 19년(645년) 2월에 태종이 낙양에서 정주(定州)로 옮겨 가서, 주위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의 후사(後嗣)가 사마(士馬)의 강성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싸움을 유도하므로, 전쟁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짐이 친히 그를 쟁취하여 후세의 걱정을 없애려 한다.” 고 하였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요동(고구려)이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의 후사(後嗣)가 사마(士馬)의 강성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싸움을 유도하므로, 전쟁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는 등의 당태종의 말을 보았을 때 고구려 임금을 「봉(封)하였다」는 구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은 거짓으로 보인다. 대신에 동등 지위자에게 쓴「배(拜)하였다」는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이 정확한 기록으로 보인다.
넷째, 모두가 반대한 고구려 침략에 대해 당태종이 둘러댄 이유
구당서 동이열전: 『이에 (당)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의 덕행이 높아 존경받는 노인(耆老:기로)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며, “요동은 옛 중국 땅이며, 도적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였으므로, 짐이 친히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어른(父老:부로)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 곧 옷감(布:포)과 식량(粟:속)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는 떠나지 말기를 권하자, (당)태종은, “나도 [그 이유를] 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가는 이 세 가지는 좋지 못한 일로서 고려를 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소문이 군주를 시해하고, 또 대신을 죽여 [제 야심을] 충족시키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구원해 주기를 목을 늘여 기다리고 있다. 논의한 자(議者:의자)들은 아직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於是帝欲自將討之,召長安耆老勞曰:「遼東故中國地,而莫離支賊殺其主,朕將自行經略之,故與父老約:子若孫從我行者,我能拊循之,毋庸卹也。」即厚賜布粟。羣臣皆勸帝毋行,帝曰:「吾知之矣,去本而就末,捨高以取下,釋近而之遠,三者為不祥,伐高麗是也。然蓋蘇文弒君,又戮大臣以逞,一國之人延頸待救,議者顧未亮耳。」)』
신당서 동이열전: 『군신(君臣)들이 모두 황제(皇帝)는 떠나지 말기를 권하자, 태종(太宗)은...(하략),』
⇒ 백성들과 신하들 모두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을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모두가 반대하자 그 반대를 물리치는 논거로 만든 것이 요동은 옛 중국 땅이라는 것과 내분이 일어났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두의 고구려 침략 반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조작하여 만든 것이 평양 낙랑설이다.
다섯째, 정관 19년(645년) 기사에 대하여:
<구당서 동이열전> 정관 19년(645년)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장군 상하 등과 강(江)· 회(淮)· 영(嶺)· 협(硤)의 강한 군사 4만명· 전선(戰船) 5백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 영국공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 (이)도종을 부총관으로 삼아서 장군 장사귀 등과 보병· 기병 6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나아가게 했다. 양군이 합세하도록 한 다음, 태종은 친히 6군(軍)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
⇒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원된 군사 수이다. 수군 4만, 육군6만이면 10만명에다가 태종이 친히 거느린 6군(6軍:7만5천명)을 더하면 고구려 침략에 동원된 군사수가 17만 5천명임을 알 수 있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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