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49, 당나라때-73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②)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②
둘째, 무덕 7년(624년) 기사에 대하여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 7년(624년)에 전 형부상서 심숙안을 보내어 건무(建武)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에 책봉하였다.(七年,遣前刑部尚書沈叔安往冊建武為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
신당서 동이열전: (무덕 4년)의 3년 뒤에 사신을 보내어 [건무(建武)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拜)하였다.(後三年,遣使者拜為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
구당서 동이열전은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고 신당서 동이열전은 배(拜)하였다고 되어 있다. 책봉은 하위를 나타내고 배(拜)는 동등을 나타낸다. 어느 것이 맞을까?
이 당시 상황을 구당서 고조본기와 신당서 고조본기를 근거로 알아보자. 구당서 고조 본기에 의하면 책봉한 때가 「무덕7년(624년) 봄 정월 기유일」이라고 되어 있고 신당서 고조 본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우선, 구당서 고조 본기에 소위 책봉을 한것이「무덕7년(624년) 봄 정월 기유일」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 전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당서 고조 본기를 보자.
<구당서 고조본기>
『무덕6년(623년) 가을 7월,돌궐의 힐리(가한)이 삭주를 침구하니,황태자와 진왕을 병주에 주둔시켜 대비하였다.
9월 병자일,돌궐이 물러나,황태자가 군대를 데리고 돌아왔다. 동도를 낙주로 고쳤다. 고개도가 돌궐을 끌고 유주를 침구하였다.
무덕7년(624년) 봄 정월 기유일,고려왕 고무를 요동군왕으로,백제왕 부여장을 대방군왕으로,신라왕 김진평을 낙랑군왕으로 봉하였다.
8월 무진일,돌궐이 병주(태원)에 침구하여,서울(장안)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임오일,돌궐이 물러났다. 을미일,서울(장안)에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무덕8년(625년) 6월 갑자일,돌궐이 정주에 침구하여,황태자는 유주로,진왕은 병주(태원)로 가도록 명하여,돌궐에 대비하였다.
8월,병주도총관 장공근과 돌궐이 태곡에서 싸웠으나,아군이 패배하여,중서령 온언박이 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9월,돌궐이 물러갔다.』
위에서 보다시피 당나라는 무덕7년(624년) 정월(1월) 전후로 돌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때이다. 이른바 돌궐에 억눌려 칭신납공(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침)하던 때이다. 당나라 자신이 남의 나라에 칭신하던 때인데 그런 주제에 다른 나라를 책봉할 주제가 되는가?
또한 같은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 5년(622년) 기사를 보면 『건무에게 글을 주어, 이르기를“짐은 보명을 삼가 받들어 온 세상에 군림하매, 3령(靈)에 공손히 순응하고 만국을 편안히 포용하고 있오. 온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이니, 일월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편안하게 하였오. 왕은 일찍이 요좌(遼左)를 통섭한 이래 대대로 번복(藩服)에 살며, 정삭을 받아 가고자 하여 멀리서 직공(職貢)에 따랐소. 그러므로 사자를 파견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와 성간(誠懇)을 피력하니, 짐이 매우 기쁘오. 바야흐로 지금은 육합(六合)이 조용하고 사해가 편안하여, 옥백(玉帛)은 이미 서로 통하고 도로는 막힌 곳이 없오. 바야흐로 친목을 펴서 길이 우호를 돈독히 하고 저마다 강역을 보전하고 있으니, 이 어찌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오. 다만 수씨(隋氏:수나라)의 말년에 병난(兵難)이 연달아 일어나니, 싸움터마다 각기 그 백성을 잃었으며, 끝내는 골육(骨肉)이 이별하고 집안이 흩어지게 하였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원한은 깊어진 채 풀지 못하였오. 이제 두나라가 서로 통화(通和)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이미 찾아 모으게 하여 찾는대로 곧장 돌려 보내라고 명령하였오. 그곳에 가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을 왕(王)은 석방하여 돌려 보내되, 아무쪼록 무육(撫育)의 방법을 다하여 함께 인서(仁恕)의 도리를 넓혀 가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五年,賜建武書曰:「朕恭膺寶命,君臨率土,祗順三靈,綏柔萬國。普天之下,情均撫字,日月所照,咸使乂安。王既統攝遼左,世居藩服,思稟正朔,遠循職貢。故遣使者,跋涉山川,申布誠懇,朕甚嘉焉。方今六合寧晏,四海清平,玉帛既通,道路無壅。方申輯睦,永敦聘好,各保疆埸,豈非盛美。但隋氏季年,連兵構難,攻戰之所,各失其民。遂使骨肉乖離,室家分析,多歷年歲,怨曠不申。今二國通和,義無阻異,在此所有高麗人等,已令追括,尋即遣送;彼處有此國人者,王可放還,務盡撫育之方,共弘仁恕之道。」)』
위에서 보면 「바야흐로 친목을 펴서 길이 우호를 돈독히 하고 저마다 강역을 보전하고 있으니, 이 어찌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오」라든가, 「이제 두나라가 서로 통화(通和)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라는 문장을 보면 서로 대등한 입장임을 피력하고 있다.
이어서 같은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 7년(624년) 기사 아래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당)고조는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명분과 실제의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려가 수나라에 칭신하였으나 마침내 (수)양제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 짐은 만물 중에 공경 받으나 교귀(驕貴)를 피우고 싶지는 않고, 다만 살고 있는 영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함께 힘쓸 뿐이지 무엇때문에 반드시 칭신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함을 자처하여야 되겠는가. 즉시 짐의 이 심정을 조술(詔述)하라.” 하였다.』 이것을 보면 분명히 당고조 이연은 고구려에 대하여 칭신하게 할 마음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그 당시 당나라는 돌궐에 억눌려 칭신납공 하던 때라 다른 나라 임금을 책봉할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는 점, 무덕 5년(622년)의 글을 보면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서로 대등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 무덕 7년(624년) 아래 나오는 글에 당고조가 고구려에게 칭신하게 할 마음이 없고 고구려를 수나라와 동등하게 대하겠다고 말한 점 등을 보았을 때 구당서 고조 본기와 구당서 동이열전 무덕7년(624년)조에 있는 책봉하였다는 이야기는 거짓으로 보인다. 대신에 신당서 동이열전에 있는 배(拜)하였다는 것이 정확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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