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48, 당나라때-72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①)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①
신구당서 동이열전에서 우리가 살펴볼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무덕 2년 및 4년 기사 2) 무덕 7년(624년) 기사 3) 정관 17년(643년) 기사 4) 모두가 반대한 고구려 침략에 대해 당태종이 둘러댄 이유 5) 정관 19년(645년) 기사 6) 고구려와 당태종 군대의 전쟁 상황과 결과 7) 기타 전쟁 전후의 기록 8) 평양 함락과 그후의 상황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째, 무덕 2년 및 4년 기사에 대하여: 구당서 동이열전에는 『무덕 2년(619년)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무덕) 4년(621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원문: 武德二年,遣使來朝。四年。又遣使朝貢)』이렇게 되어 있고, 신당서 동이열전에는 『무덕(618~626년) 초(初)에 (고구려가) 두 번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원문: 武德初,再遣使入朝)』이렇게 되어 있다.
무덕 2년(619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당서 고조 본기를 보자.
2월 정유일에는『두건덕이 우문화급을 요성에서 공격하여,목을 베고,머리를 돌궐에게 전하였다.』고 되어 있고,
4월 을사일에는 『왕세충이 월왕의 미련한 자리를 빼앗고,천자를 참칭하며,나라 이름을 정이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며,
9월 신미일에는 『도적 우두머리 이자통이 강도를 근거지 삼아,천자를 참칭하고,나라 이름을 ‘오’라고 하였다. 심법흥이 비릉을 근거지 삼아,양왕을 참칭하였다. 배적이 유무주의 장수 송금강과 개주에서 싸웠으나,패배하여,우무위대장군 강보의가 죽었다. 병주총관、제왕 (이)원길은 (유)무주에게 핍박을 받자 두려워서,서울(장안)로 달아나니,병주가 함락되었다.』라고 되어 있으며,
10월 을묘일에는 『진왕 (이)세민이 유무주를 토벌하고자,포주에 진을 치니,모든 군사가 성원하였다. 임자일,유무주가 진격하여 진주를 포위하였다.』라고 되어 있고,
11월 병자일에는『두건덕이 여양을 함락하여,산동의 땅을 죄다 가졌다』라고 되어 있다.
즉, 이때 당고조 이연은 장안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장안의 동쪽 낙양은 왕세충이 차지하고 있는 상태이고 낙양의 북쪽지방은 두건덕이 차지하였고, 중국 남쪽지방인 강도는 이자통이 차지하였으며, 장안의 북쪽이자 당나라 세력의 본거지인 병주(태원)는 유무주에게 빼앗긴 상태이고 그 북쪽에는 당나라가 칭신납공하던 초강대국, 돌궐이 있었다.
한마디로 장안(당나라)의 동서남북이 다 막혀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장안(당나라)에 들어가려면 두건덕이 차지하고 있는 하북지방을 지나 왕세충이 차지하고 있는 낙양을 거쳐야 장안(당나라)으로 들어갈 수 있고 아니면 유무주가 차지하고 있는 병주(태원)을 거쳐야 장안(당나라)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어떻게 고구려 외교사절(사신)이 장안(당나라)에 들어갈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때는 중국의 모든 지역이 전쟁상태인데 어떻게 고구려 외교사절(사신)이 전쟁 중인 지역을 뚫고 장안(당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하였을까?
이런 점을 생각하면 『무덕 2년(619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는 기사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 기사가 사실일 가능성은 한가지 있다. 「고구려의 국력이 엄청나게 강력하여 중국 어느 지역에서도 감히 고구려의 위력 앞에 꼼짝을 못해 고구려 외교사절(사신)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으므로 고구려 외교사절(사신)이 중국의 모든 지역을 뚫고 유유히 장안(당나라)를 방문하였다.」이렇다면 가능하다. 이렇다면 중국의 강자라고 하는 어느 놈도 고구려 사신의 행렬을 감히 해치지 못하니 장안(당나라)까지 충분히 갈 수 있고, 전쟁 지역임에도 그 지역들을 유유히 뚫고 장안(당나라)까지 방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힘없고 이름없는 약소국이었다면 전쟁지역을 지나갈 수도 없을뿐만 아니라 평화시에도 국경통과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가다가 도둑들에게 다 털리거나 지역 강자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과 적대국가인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위의 기사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만약 사실이라면 그 당시 고구려가 엄청난 강대국임을 중국 모든 지역에서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한 구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무덕 2년(619년)에 사신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근(朝覲: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뵘) 이렇게 완전히 거꾸로 번역해 놓았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만약 사실이라면 고구려가 엄청나게 강대국이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고구려가 하위국의 입장에서 상위국 당나라를 뵈러 가는 것처럼 번역을 해놓았으니 역사적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도 이렇게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버릴수 있는가? 세상에 이런 번역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이렇게 번역한 놈도 때려죽일 놈이고, 이 번역이 맞다고 공식 채택한 국사편찬위원회도 때려죽일 놈들이다. 한마디로 아직도 우리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을 보면 「遣使來朝」으로 되어 있으니 「사신을 보내 (당나라) 조정에 왔다.」이렇게 번역하면 정확한 것을 고구려가 마치 신하의 입장에서 윗사람의 나라인 당나라 임금을 찾아 뵌 것처럼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보여줄뿐만 아니라 식민사관의 개들이 우리역사를 무조건 굴종의 역사, 종속의 역사로 매도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우리역사를 매도하면서 그것이 사실인양 떠들어대고, 자기들은 실증사학을 하고 있다고 아가리질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실증사학이 아니라 관련 사실조차 모르는 무식사관이며, 거짓말을 끼워넣은 사기꾼 사관이다. 한미디로 무식과 사기가 합쳐진 무식한 사기꾼 사관이 실증사학의 실체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국사학자라는 것들이다. 참으로 때려죽일 놈들이다! 이것들을 어떻게 씹어 먹어야하고 어떻게 찢어 죽여야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솟구쳐 오른다.
이런 것들이 말한대로 우리 후손이 우리역사를 배우고 우리역사가 그런줄 알고 있으니...... 참으로 울화가 치민다...........
사실을 거꾸로 말해도 분수가 있고 사기를 쳐도 분수가 있는 법인데 식민사관의 개들이 이따위로 거짓말 사기를 아직까지 쳐대고 있으니.......
그 다음 무덕 4년(621년)의 상황도 구당서 고조 본기에 의하면
3월에 두건덕이 왕세충을 와서 도와,당나라의 관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5월에 진왕(이세민)이 두건덕을 생포하자,왕세충도 항복하여, 7월 진왕이 개선하여 두건덕을 목 베고 왕세충을 촉에 유배시켰으나 두건덕의 나머지 무리인 유흑달이 장남(漳南)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8월,연주총관 서원랑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니,이에 유흑달이 호응하며,노왕을 참칭하였다. 12월 정묘일,진왕과 제왕 원길에게 유흑달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무덕5년(622년)에는 정월,유흑달이 명주를 근거로 삼아,한동왕을 참칭하였다. 3월 진왕이 유흑달을 명수 가에서 깨뜨리고,다시 그의 주현을 다 함락시키니,유흑달은 돌궐로 달아났다. 울주총관、북평왕 고개도가 반란을 일으켜,이주(易州)를 침구하였다. 6월,유흑달이 돌궐을 끌고 산동에 침구하였다. 8월 돌궐의 힐리가한이 안문을 침구하였다. 기미일,더 진격하여 삭주를 침구하였다. 황태자와 진왕을 보내 치며 토벌하였으나,대패하였다.
이런 것을 보았을때 무덕 4년(621년)에는 아직도 하북을 평정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는 이때에도 돌궐에 칭신납공(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침)하던 때이다.
즉, 당나라 자신도 돌궐에 공물을 바치는 주제이며 하북을 아직 평정하지 못한 점을 보았을 때 구당서 동이열전의「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遣使朝貢)」는 기록은 거짓 기록으로 보이며 신당서 동이열전의「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遣使入朝)」기록이 정확한 기록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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