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46, 당나라때-70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4 끝.)

상 상 2014. 6. 27. 17:15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46, 당나라때-70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4 .)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

4. 구당서 태종본기()

5. 구당서 고종본기()

6. 구당서 고종본기()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4

 

1)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고구려 침략 전 당태종의 주변국가 침략

고구려 침략 상황과 침략시 및 도주시 행군속도

고구려가 당태종을 꺾은 사실이 우리역사에 끼친 영향

 

2) 양서진서(陳書)북제서주서수서의 5대사(五代史) 제작

 

  

고구려가 당태종을 꺾은 사실이 우리역사에 끼친 영향

고구려가 당태종을 꺾었다는 소식은 북방민족들에게 퍼져 우리민족은 북방민족에게 엄청난 민족임을 각인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북방의 최강인 돌궐을 멸망시키고, 서쪽에 토욕혼을 꺾었으며, 고창을 멸망시켰는데,

그런 당태종을 고구려가 꺾었으니 고구려야말로 이 세상의 최강 중의 최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각인된 우리민족이 강대하다는 북방민족의 인식은 돌궐에 이은 몽골족에게 이어져

남송을 멸망시키고 있었던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였던 고려 원종이 찾아가자 매우 기뻐하며 혼인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그렇게 강대했던 원나라가 고려만큼은 멸망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딸을 주면서 동맹을 맺으며 존중했던 것이다.

후에 청나라가 조선을 이기고도 멸망시키지 않은 것도 그런 영향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 당태종을 꺾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툭하면 당신네 나라는 당태종도 꺾은 나라...운운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고구려가 당태종을 꺾은 것은 우리민족의 영생을 보장했던 것이다.

 

2) 양서진서(陳書)북제서주서수서의 5대사(五代史) 제작

 

우리가 구당서 태종본기에서 살펴봐야 할 또하나의 사항은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정관10(636) 봄 정월 임자일상서좌복야 방현령시중 위징이 양수의 오대사(五代史)를 올리니

비각(秘閣)에 소장하도록 명하였다.

 

위 기사는 당태종 때 양서, 진서(陳書), 북제서, 주서, 수서의 5개 사서를 썼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이 중국에서 고구려 왕을 책봉하였다는 기록은 딱 4군데 나오는데

그것이 진서(晉書) 모용준 재기, 수서 고구려전, 구당서 고조본기, 구당서 동이열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의 공통점은 모두 당태종과 관련된 사서라는 것이고

이것 모두 당태종 일당이 역사를 멋대로 조작하여 사기를 친 것이라는 점이다

 

진서(晋書)는 당태종 정관18년에서 20년 사이에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관(史館)을 설치하고 편찬위원에 의하여 저술된 관찬(官撰) 사서이며

특히 당태종 자신이 선제(宣帝무제(武帝육기(陸機왕희지(王羲之)4()서술하여

제지(制旨) 또는 어찬(御撰)이라 부를 정도로 깊숙이 관여하여 쓴 것이다.

또한, 신당서 동이열전에()태종은 손수 지은진서(晋書)를 내려 주었다라는 구절을 보면

당태종이 진서(晋書) 제작에 어느정도 깊숙이 관여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서는 위에서 보듯이 구당서 태종 본기 정관 10년 정월에 제작을 완료한 것이고

구당서 고조 본기는 태종이 직접 그 실록을 뜯어 고친 것이다.

 

이어서 구당서 동이열전에는 당고조 이연때 고구려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였다는 기사와

당태종때 고구려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중에서 당태종 때 고구려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였다는 기사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고조 이연 때 고구려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였다는 거짓말은 조작을 하였을지언정 고조 본기에 있는데

당태종 때 고구려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였다는 기사는 구당서 태종 본기에 없음은 물론이고

신당서 태종 본기에도 없을뿐만 아니라 같은 동이열전인 신당서 동이열전에도 없다.

오직 구당서 동이열전에만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당태종 실록을 만든 자들이 감히 당태종처럼 고종본기를 뜯어 고치지 못해서 당태종 본기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수서 동이열전처럼 슬그머니 구당서 동이열전에 거짓말을 꾸며 넣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고구려 왕을 책봉하였다는 기록은 전부 당태종과 그 일당이 제멋대로 조작하여 사기친 것이라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고구려침략을 모두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하도 백성도 심지어 황태자도 극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기 위한 논리로 고구려 왕은 중국에서 책봉한 왕이고,

고구려 땅은 옛 한나라 때부터 중국 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거는 신하와 백성, 태자까지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한 사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 왕은 중국에서 책봉한 왕이라는 거짓은 왜 거짓인가를 위에서 보여주었고

이제 고구려 땅이 옛 한나라 때부터 중국 땅이라는 거짓말 사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것이 이른바 평양 낙랑설인데 이는 육도원이 수경에 주를 달면서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수경주의 저작연대: 연창 4, 515년으로 추정)

 

그런 것을 당나라 시대에 당태종의 4남 이태가 괄지지를 지으면서 평양이 낙랑군 왕험성이라고 되받았다.(정관 16, 642)

 

또한 당태종은 안사고(581~645)를 내세워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면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는 정체불명의 신찬이라는 사람의 설이 맞다고 하는 형식을 빌어

평양(왕험성)이 낙랑군임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거짓말은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에 백성과 신하 심지어 황태자까지 반대했기 때문에 꾸며낸 사기극이었다.

 

잠시 평양 낙랑설이 왜 거짓말 사기인지 살펴보자.

(자세한 것은 나중에 중국 정사 지리지들을 동원해 자세히 분석할 것임)

평양 낙랑설의 논쟁이 있는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주석들은 다음과 같다.

1) 사기 조선열전 중 조선에 대한 사기정의의 주석:

괄지지에서 이르기를 고구려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의 낙랑군 왕험성이다라고 하였다.

(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

 

2)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에 대한 주석:

응소가 말하기를조선왕 만의 도읍이다. 물이 험함에 의지하여험독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데이곳이 험독이다라고 하였다.

()사고가 말하기를찬의 설이 옳다라고 하였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說是也。」)

 

3) 사기 조선열전 왕험(王險)’에 대한 주석:

사기집해: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있는 험독현이다라고 하였다.

사기색은: 위소가 말하기를 옛 읍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있는 험독현이다라고 하였다.

응소가 (한서)지리지에 주석하기를 요동 험독현이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고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索隱韋昭云古邑名.徐廣曰昌黎有險瀆縣.

應劭注 地理志, 遼東 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

 

사기 주석서

1) 사기집해: 남조 송나라 때 배인이 썼으며 그의 활동시기는 대략 서기 430년 경이다.

2) 사기정의: 당나라 때 장수절이 썼으며 그의 활동 시기는 측천무후 때이다.(690~705)

3) 사기색은: 당나라 때 사마정이 썼으며 그의 활동시기는 당현종 때이다(712-756)

 

주석가

1) 응소: 후한 말의 정치가로 예주 여남군 남돈현 사람이며 204년에 죽었다.

2) 서광: 동진 때의 역사가로 352년에 태어나 425년에 죽었다.

3) 신찬: 서진 때의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지 그 외에는 성씨도 모를 정도로 정체불명인 사람임.

 

 

그러니까 평양 낙랑군설의 논쟁이 벌어진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응소는험독현이 요동군에 있는 것이 맞고, 험독현이 조선왕 ()만의 도읍지라고 했고,

신찬은험독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 왕험성이라고 하여 엇갈렸는데,

안사고가찬의 설이 옳다고 하였지만

무슨 근거로 찬의 설이 옳다고 하는지, 왜 찬의 설이 옳은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

즉 근거도 없이 자기 멋대로 판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약 200년 앞선 남조 송나라 때 배인이 쓴 사기 주석서인사기집해

당태종보다 약 100년 뒤인 당현종 때(712-756) 때 지어진 사기 주석서인사기색은

동진 때의 역사가 서광이 (왕검성은) 창려에 있는 험독현이다이라고 함으로써

응소의 설이 맞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 안사고의 판정은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다.

 

, 안사고가 제시한 한서(漢書)의 주석은 후한 이래 당나라까지의 주석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안사고는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에 대한 주석을 두가지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응소의 주석이고, 다른 하나는 신찬의 주석이다.

서광의 주석이 빠졌다는 말이다.

 

모르고 빠뜨렸다면 무지나 무식이고 알면서도 일부러 빠뜨렸다면 사기이다.

, 안사고의 판정은 무식이거나 사기라는 말이다.

무식한 주장을 했거나 자기의 주장을 맞다고 꾸며대기 위해 사기를 쳤다는 말이다.

(서광의 주석은 안사고 이전에도 주석서에 인용되었고 안사고 사후에도 주석서에 인용되었으므로 일부러 뺀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하나, 응소는 중평 2(185) 한수 등이 강족과 함께 반란사건 후 태산태수를 지냈고,

건안 원년(196), 한관례의고사(漢官禮儀故事)를 완성하여 헌제에게 바치는 등 행적이 분명한 사람임에 반해,

신찬(臣瓚)은 서진(西晋)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성씨도 모르는 실체가 불분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 허깨비같은 신찬의 주장을 맞다고 판정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한 말은 도외시하고 있지도 않은 귀신이 한 말이 맞다고 판정한 것이니

황당한 판정이며 완전히 엉터리 판정임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안사고의 판정은 자기 자신의 궤변을 위해 도깨비를 동원하였다는 말이다.

(안사고 자신이 신찬이라는 필명으로 주석을 직접 써서 사기를 쳤을 가능성도 있음)

한마디로 어거지이며 엉터리라는 말이다.

 

이와같이 황당한 궤변과 어거지 및 사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평양 낙랑설이다.

이러한 황당한 궤변 및 어거지 사기인 평양 낙랑설은 신하와 백성, 태자까지 고구려 침략을 모두 반대하자

그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꾸며낸 사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황당한 거짓말 궤변은 당 고종이 평양을 함락함으로써 거짓말이 사실이 되고 사기가 진실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엉터리 거짓말 사기가 진실로 둔갑되어 후에 신구당서를 쓸 때에는 당당히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이라고 쓸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중국 정사에 평양 낙랑설이 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 신구당서 동이전이 정사(正史)로써 평양 낙랑설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이것이 송나라와 원나라에 전해졌고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을 수입한 고려 역시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믿었으며 그것은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수입한 고려말 조선조의 사대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조선조를 건국한 사대부들에게 이어져 조선조 지배층 및 지식인 충은 모두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믿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이 일제에 의해 악용되고 식민사관의 개들에게 계승되어 한국의 강단사학계에서는 평양 낙랑설이 정설이 되고 말았다.

 

여태까지 살펴보았듯이 평양 낙랑설도 당태종이 퍼뜨린 거짓말이요 사기이며 따라서 당태종은 우리역사에 재를 뿌린 원흉이요, 우리역사에 악영향을 끼친 악당 괴수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고구려 왕 책봉설이나 평양 낙랑설 모두 고구려 침략을 반대하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꾸며낸 황당한 거짓말 사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태종이 신하와 백성, 태자까지 모두가 고구려 침략을 반대하자, 궁여지책으로 꾸며댄 사기가 우리 역사에 이토록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