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대주류왕)- 3

상 상 2011. 11. 19. 18:44

8 년 (AD 25) : 을두지를 우보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번역문]8년(서기 25) 봄 2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9 년 (AD 26) : 10월에 개마국을 정벌하여

[번역문]9년(서기 26) 겨울 10월에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10 년 (AD 27) : 을두지를 좌보로, 송옥구를 우보로 삼았다.

[번역문]10년(서기 27) 봄 정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았다.

 

11 년 (AD 28) :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쳐들어 왔다.

[번역문]11년(서기 28)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신이 듣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벌같이 일어나는데 명분없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므로 그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꾀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은 “꾀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한나라 군사들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따라 하면서 글을 보내었다.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 없어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으므로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황제께서는 신을 둔하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하도록 영을 내려 대왕의 죄를 물었습니다.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났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내]온 [글의] 뜻을 들으니,

말씨가 공순하므로 어찌 이대로 황제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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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오늘 내용의 골자를 보면

① 을두지를 우보로 삼았다

② 개마국을 정벌했다. 구다국이 항복했다.

③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 왔다가 돌아갔다.   이정도입니다.

 

1) 이중에서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는 기사는

유리왕 33년(AD 14)조의『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는 기사와

유리왕 22년(서기 3) 12월조에 나오는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였다.』는 기사,

신라 제2대 남해 차차웅 본기 7년(서기 10)조, 『가을 7월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을 맡겼다.』는 기사와

비교가 되고, 또한 을두지는 태자나 대보와 같은 직위를 받은 것입니다.

 

보통은 대보(大輔)가 있고 그 좌우에 좌보(左補)와 우보(右補)를 두는 것인데,

대무신왕 때에는 대보(大輔)없이 좌보(左補)와 우보(右補)를 두고 있습니다.

대무신왕(대주류왕) 자신이 태자였을 때 대보에 해당하는 직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개마국을 정벌했다. 구다국이 항복했다.」는 기사를 보면

대무신왕(대주류왕) 때는 시조 동명왕 때와 마찬가지로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보면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지방에 군현제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한나라 요동태수가 침입했을 때 ‘위나암성’으로 들어갔는데

이 성은 유리왕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로 천도할 때 쌓았던 성이‘위나암성’입니다

 

4) 참고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좌보(左補) 우보(右補)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쓰신 ‘조선상고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 · 말 · 불' 삼한(三韓)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세 사람을 두었으니, 가로되 `신가' · `팔치 ' · `발치 '다. `신가'는 태대신(太大臣)이란 뜻이니, 이두자로 `상가(相加)'라 쓰고, `신가'의 별명이 `마리'로 머리(頭)란 뜻이니, 이두자로 대로(對盧- 대는 옛 뜻으로 마주)라 쓰고, `신가'나 `마리 '를 한문으로는 국상(國相) 혹은 대보(大輔)라 썼다. 팔치는 `팔꿈치(肱)'란 뜻이니, 이두문자로 패자(沛者)라고 썼다.  발치는 ‘다리(股)`란 뜻이고 이두문자로 평자(評者)'라 쓰는데, 팔치 발치를 한문으로는 `좌보(左輔)· 우보(右輔)'라 썼다. 위의 세 가지를 만일 한문으로 직역하자면 `두신(頭臣)'· `굉신(肱臣)' · `고신(股臣)'이라 할 것이지마는, 글자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대보·좌보·우보'라 했다.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 등의 책에 혹 앞의 것을 좇아 `대로(對盧)· 패자(沛者)· 평자(評者)'로 기록하고, 혹은 뒤의 것을 쫓아 `대보· 좌보· 우보'라 하였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이름

신가

팔치

발치

태대신(太大臣), 별명 머리

팔(肱)

다리(股)

한문직역

두신(頭臣)

굉신(肱臣)

고신(股臣)

이두문자 표기

 대로(對盧)  

패자(沛者)

평자(評者)

한문 표기

국상(國相) 혹은 대보(大輔)

 좌보(左輔)

우보(右輔)

 

즉, 대로=대보,  패자=좌보,  평자=우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관제(官制)도 고구려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항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면 나중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게 되니 주의 깊게 봐두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