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2

상 상 2011. 11. 18. 20:53

4 년 (AD 21) :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번역문]

4년(서기 21)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요!”

[왕은]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은밀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5 년 (AD 22) : 2월에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번역문]

5년(서기 22)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 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랬다.

3월에 신비로운 말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겨울 10월에 괴유가 죽었다. 전에 병이 심해지자 왕은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괴유가 말하였다.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두터운 은혜를 거듭 입었으므로 죽어도 사는 것 같아서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계절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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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원본출처 수정)

 

2. 해설 및 분석

대무신왕 두 번째입니다.

 

1) 여기서 대무신왕은 고구려를 위협하던 부여를 정벌하기로 하고, 길을 떠납니다.

 

정벌하러 나가는 길 도중에

① 부정(負鼎)씨를 얻고 ② 북명사람 괴유를 얻으며, ③ 적곡사람 마로를 얻습니다.

 

2) 부여와의 전투에서 부여왕 대소를 죽입니다.

그러나 부여군은 오히려 고구려군을 포위, 고구려군이 큰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큰 안개가 끼어 그 틈을 타고 대무신왕은 포위를 빠져나옵니다. 이것으로 부여 정벌은 끝납니다.

 

3) 이 전쟁의 결과, 부여는 큰 혼란에 빠지는데,

 

첫째, 대소의 막내동생이 부여(동부여)가 망할 것으로 판단, 부여에서 따로나와 갈사수에서 나라를 세우고 갈사국왕이 됩니다.

(단재선생은 갈사국을 동남부여라고 하였음)

 

두 번째는 대소의 사촌동생이 부여(동부여) 사람 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합니다. 이로써 동부여는 멸망합니다.

 

4) 대무신왕은 투항한 대소의 사촌동생을 왕으로 봉하며, 낙(絡)씨 성을 주어 연나부(掾那部)에 둡니다.

추모(주몽)이 송양을 다물국왕으로 봉한 점을 상기할 때, 고구려에는 왕이 2~3명이 있는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왕이 하나있고, 좌우(左右)에 부왕(部王)이 둘이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5) 또하나,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는 기사를 보면

고구려는 국가 초기부터(제3대 대무신왕 때부터) 5부 체제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 있어서 5부(部)란 동서남북중(전후좌우중, 상하좌우중)이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부(沸流部)·연나부(椽那部)·관나부(貫那部)·환나부(桓那部) 등 4부의 이름이 전하고 있고,

〈삼국지〉에 의하면 계루부(桂婁部)·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입니다.

 

6) 오늘 올린 기사의 끝부분을 보면 괴유가 죽는데 이 괴유라는 사람은 부여와의 전투에서  부여왕 대소의 머리를 베어 죽인 사람입니다.

 

7) 이로써 고구려와 부여의 위치가 바뀝니다. 고구려가 강국으로 부여가 약소국으로 정반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