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AD 9) : 태자 해명에게 칼을 주어 목숨을 끊게 하였다.
[번역문]
28년(서기9)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 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사론(史論):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하여야 하는데,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무용(武勇)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들으니 좌전(左傳)에 말하기를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그릇된 데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악하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였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에 부여왕 대소(帶素)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왕과 당신의 선군인 동명왕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꾀어내어 도망쳐
이곳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대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군신들과 상의하고 [부여왕에게] 회답하였다.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신령(神靈)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참언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도망나온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전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를 경멸하니,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아뢰시오.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여왕이 듣고 [그 뜻을]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老嫗]이 대답하였다.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굴복하여] 오기를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29년 (AD 10) :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싸웠는데,
[번역문]
29년(서기 10) 여름 6월에 모천(矛川) 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져서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논의하던 [어떤] 사람이
“검은 색은 북방 색이다. 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고 말하였다.
가을 7월에 두곡(豆谷)에 별궁을 지었다.
31 년 (AD 12) : 왕망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려
[번역문]
31년(서기 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 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안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래서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32년 (AD 13) : 아들 무휼을 시켜 부여군대를 막게 하였다.
[번역문]
32년(서기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33년 (AD 14) :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번역문]
33년(서기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37년 (AD 18) : 왕을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번역문]
37년(서기18)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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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2. 해설 및 분석
1) 이제 유리왕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서 유리왕이 새로 태자가 된 해명을 자결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태자 해명은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힘으로 꺾어 고구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유리왕은 황룡국과의 관계악화를 두려워해서 자기아들인 해명을 자결시킵니다.
유리왕은 부여의 왕인 대소가 태자 도절을 볼모로 삼으려 할때
태자 도절이 볼모 가기를 거절한 사건 때문에 태자 도절이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또다시 황룡국과의 관계악화를 두려워하여 유리왕은 새로 태자가 된 해명을 자결시킵니다.
태자를 죽여서라도 부여와 황룡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할만큼 그 당시 부여와 황룡국은 강대국이었고
고구려는 신생 약소국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편에서 보았다시피 유리왕 14 년(BC 6)조를 보면 태자 도절이 볼모를 거절하자
부여왕 대소는 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2) 그 다음에 발생한 사건이 대소(부여왕-금와왕의 맏아들)가 또 고구려를 위협합니다.
여기서 유리왕은 굴복하려 했으나 왕자 무휼이 나서서 대소의 사신에게 당당하게 응대합니다.
3) 무휼이 한 말
『나의 할아버지는 신령(神靈)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참언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도망나온 것입니다.』이 말을 가지고
동국 이상국집이 인용한 구삼국사(舊三國史)의 기록이 맞는 것인지,위서(魏書)의 기록이 맞는 것인지 또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구삼국사는
『왕(대소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주몽이 마음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나는 천제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려 하나...』
이렇게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한 것이 부여를 도망한 직접적인 원인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 반면에 위서(魏書)는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 모의를 꾸미자, 주몽의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너를 해치려 하니, 너 같은 재주와 경략을 가진 사람은 아무데고 멀리 떠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서 주몽의 어머니(유화) 말이 부여를 떠나 도망한 직접적인 원인임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구삼국사의 기록이 맞는 기록이며 정확한 기록이고
위서는 틀린 기록이며 전해들은 말을 근거로 비슷하게 꾸민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4) 31년(AD 12)조에 나오는 「왕망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려...」는
위 본문 기록에 있듯이 한서와 후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 있는 것을
추려 재단(오리기)하여 여기 삼국사기에 붙인(편집한) 것입니다.
후한서 동이열전를 보면,
『왕망(王莽)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추려 재단하고 약간 고쳐 삼국사기에 붙여 놓은 것입니다.
5) 대소왕이 또다시 고구려를 쳐들어오며, 쳐들어온 부여군을 왕자 무휼이 학반령에서 무찌릅니다.
왕자 무휼은 그 공으로 태자가 됩니다.
6)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는 기록은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을 맡겼다.』는 신라 남해왕 본기 기록과 비교를 해보면
대보(大輔)라는 직위가 다음 임금이 될 태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직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7) 그 다음 유리왕은 오이와 마리(부왕인 주몽을 따라 부여를 나온 개국공신)를 시켜 양맥이라는 나라를 정복합니다.
이때에 동원한 군사가 2만이라고 하니 이때 벌써 고구려도 웬만한 국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 이에 더하여 군대를 진격시켜
고구려현(고구려와 다른 한나라 현도군의 한 현)을 공격하여 차지합니다.이로써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은 없어집니다.
7) 그다음에 나오는 기사가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죽는 불행한 사건이 또 발생합니다.
유리왕때 왕자 내지 태자가 죽은 인물을 다시한번 보면
첫번째가 태자 도절이고, 두 번째가 태자가 된 해명이며, 세 번째가 왕자 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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