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0, 당나라때-34 (9.신당서 돌궐전⑪)

상 상 2014. 3. 12. 17:12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0, 당나라때-34 (9.신당서 돌궐전⑪)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9. 신당서 권215 돌궐전⑪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上

 

2) 번역문 출처: 신당서 외국전(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ndex.do)

※번역문이 있는 곳: 위 홈페이지/ 도서/ 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

 

☆ 이 부분의 처음 단락과 마지막 단락은 번역 원문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번역 한 것임.(가운데 단락은 번역원문을 복사한 것임) 

번 역 문

원 문

힐리(가한)이 망하자,그 부하는 혹 설연타로 달아나고,혹 서역으로 들어갔으나,투항자가 아직 10여만에 이르러,적당한 조치를 의논하도록 명하니,모두 말하기를:「돌궐은 중국을 오랬동안 어지럽혔으니,지금 하늘이 망하게 하였는데,올바름을 뒤따라 스스로 돌아온 게 아니므로,청하옵건데 다 항복자와 포로 명부에 등록하고,연(주)와 예(주)의 한적한 곳에 받아들여,농사와 길쌈을 익히게 한다면,백만의 오랑캐를,제나라 사람으로 변화시킬수 있으니,이것은 중국에 호구(戶口)를 늘리게 하고,고비사막 북쪽은 마침내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중서령 온언박은 청했다. “[후]한 [광무제] 건무(建武)년간(25~220) 같으면 항복한 흉노를 오원새(五原塞)에 머물게 해 그 부락을 보전하게 함으로써 울타리[扞蔽]로 삼았고, 그 습속을 바꾸지 않고 다독여 비어 있는 땅을 채움으로써 역시 전혀 의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돌궐 항호들이] 연[주]와 예[주]로 들어오게 된다면 그 본성을 어그러뜨릴 뿐만 아니라 거두어 기르는 도리가 아닙니다.”

비서감(祕書監) 위징(魏徵)이 건의해 말했다. “돌궐은 대대로 중국의 원수가 되었다가 지금에야 그들이 와서 항복을 했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죽여 없애 마땅히 하북(河北)으로 돌려보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금수처럼 나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우리와 족속이 달라 약하면 엎드리고 강해지면 반발하는 것이 그 타고난 심성입니다. 또 진나라와 한나라가 날랜 병사와 용맹한 장군으로 [흉노를] 공격해 하남 땅을 얻어 군현(郡縣)으로 삼은 것은 [그들을] 중국에 가깝게 두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하남에 살게 하려고 하십니까? 또한 항복한 자들이 10만이나 되는데 만약 몇 년이 지나게 되면 자식들이 배로 늘어날 것이고 [그들이] 경기(京畿)에 가깝게 살기 때문에 큰병[心腹疾]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온]언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자께서는 사이(四夷)들에게 마치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르듯이 덮고 실어 온전하게 해주셔야 하는데, 지금 돌궐이 멸망하여 남은 백성들이 귀부함에도 슬프고 가엾게 여기지 않고 버리시는 것은 하늘과 땅이 입히고 덮어주는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 사이들[이 귀순하려는 것]을 막아 미움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소신이 [돌궐을] 하남에 살게 하자고 말씀드린 것은 모두 죽은 것을 [다시] 살리고 없어진 것을 [다시] 있게 하자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그들이 대대로 덕을 품게 될 것이라 어찌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위]징이 말했다. “[조]위(曹魏)시기에는 흉노 부락[胡落]을 [내지의] 군 근처에 살게 했다가 [서]진(西晉)이 오(吳)나라를 평정하자 곽흠(郭欽)과 강통(江統)이 [진(晉)] 무제(武帝)에게 [그들을] 쫓아낼 것을 권했으나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유[연](劉淵)과 석[륵](石勒)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 중국[中夏]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굳이 돌궐을 끌어들여 하남에 살게 하신다면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걱정거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온]언박이 말했다. “성인의 도는 통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르침에는 구분이 없다[有敎無類].’라고 했습니다. 저 손상당하고 남은 것들이 궁핍해져서 우리에게 귀부했으니 우리가 돕고 보호해 거두어 내지에 살게 하면 예법을 가르칠 수도 있고 농사를 업으로도 삼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추장들의 아들[酋良]을 뽑아 숙위(宿衛)로 삼을 수 있는데,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또한 광무[제](光武帝)가 남선우(南單于)를 두었음에도 결코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중서시랑 안사고(顏師古), 급사중(給事中) 두초객(杜楚客), 예부시랑(禮部侍郎) 이백약(李百藥)등도 모두 황제에게 [돌궐을] 하북에 두고 수장(首長)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부락을 통솔하게 하되, 땅의 많고 적음을 따져 [나누어 놓음으로써] 서로 신속(臣屬)할 수 없도록 하면 나라가 적어지고 힘이 나뉘어 끝내 중국에 대적할 수 없게 하는 [즉] 긴 고삐로 멀리 떨어져 부리는 방법만한 것이 없다고 주청했다.

 

황제가 (은)언박의 말에 따라,삭방의 땅을 모두 헤아려,유주로부터 영주(靈州)까지 연속하여,순(주)、우(주)、화(주)、장(주)의 4개 주(州)를 건설하여 도독부로 삼고,힐리(가한)의 옛 땅을 쪼개어,왼쪽에는 정양도독(부)를、오른쪽에는 운중도독(부) (등) 두 개 부(府)를 설치하여 통솔하게 하였다. 호걸 추장을 뽑아 장군과 낭장으로 삼은 자가 5백 명이고,정기적으로 조회에 참여하는 자(奉朝請者) 또한 백명이며,장안에 들어와 스스로 호적에 편제된 자가 수천호(數千戶)였다. 이에 돌리가한을 순주도독으로 삼아,그 부하를 거느리고 부락으로 나가도록 명하였다.

頡利之亡,其下或走薛延陀,或入西域,而來降者尚十餘萬,詔議所宜,咸言:「突厥擾中國久,今天喪之,非慕義自歸,請悉籍降俘,內兗、豫閑處,使習耕織,百萬之虜,可化為齊人,是中國有加戶,而漠北遂空也。」

 

中書令溫彥博請:「如漢建武時,置降匈奴留五原塞,全其部落,以為扞蔽,不革其俗,因而撫之,實空虛之地,且示無所猜。若內兗、豫,則乖本性,非函育之道。」祕書監魏徵建言:「突厥世為中國仇,今其來降,不即誅滅,當遣還河北。彼鳥獸野心,非我族類,弱則伏,彊則叛,其天性也。且秦、漢以銳師猛將擊取河南地為郡縣者,以不欲使近中國也。陛下奈何以河南居之?且降者十萬,若令數年,孳息略倍,而近在畿甸,心腹疾也。」彥博曰:「不然,天子於四夷,若天地養萬物,覆載全安之,今突厥破滅,餘種歸命,不加哀憐而棄之,非天地蒙覆之義,而有阻四夷之嫌。臣謂處以河南,蓋死而生之,亡而存之,彼世將懷德,何叛之為?」徵曰:「魏時有胡落分處近郡,晉已平吳,郭欽、江統勸武帝逐出之,不能用。劉、石之亂,卒傾中夏。陛下必欲引突厥居河南,所謂養虎自遺患者也。」彥博曰:「聖人之道無不通,故曰『有教無類』。彼創殘之餘,以窮歸我,我援護之,收處內地,將教以禮法,職以耕農,又選酋良入宿衞,何患之卹?且光武置南單于,卒無叛亡。」於是中書侍郎顏師古、給事中杜楚客、禮部侍郎李百藥等皆勸帝不如使處河北,樹首長,俾統部落,視地多少,令不相臣,國小權分,終不得亢衡中國,長轡遠馭之道也。

 

帝主彥博語,卒度朔方地,自幽州屬靈州,建順、祐、化、長四州為都督府,剖頡利故地,左置定襄都督、右置雲中都督二府統之。擢酋豪為將軍、郎將者五百人,奉朝請者且百員,入長安自籍者數千戶。乃以突利可汗為順州都督,令率其下就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