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7, 당나라때-31 (9.신당서 돌궐전⑧)

상 상 2014. 3. 5. 17:10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7, 당나라때-31 (9.신당서 돌궐전⑧)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9. 신당서 권215 돌궐전⑧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上

 

2) 번역문 출처: 중국정사외국전 중 신당서 외국전(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ndex.do)

※번역문이 있는 곳: 위 홈페이지/ 도서/ 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

 

☆ 이 부분은 번역 원문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번역 한 것임.

번 역 문

원 문

다음 해(628년),돌리(가한)이 스스로 말하기를 힐리(가한)의 공격을 당했다고 하면서,구원을 요구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짐이 힐리(가한)과 동맹을 맺었고,또한 돌리(가한)과는 형제의 약조가 있으니,구원하지 않을수 없다,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병부상서 두여회가 말하기를:「이적(夷狄)은 신의가 없으니,우리가 비록 약속을 했다고 하나,저들은 늘 약속을 저버리므로,지금 난리가 났으므로 치는 것이,업신여겨 멸망시키는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로 장군 주범으로 하여금 태원에 주둔했다가 (힐리가한을) 공격하여 점령해서 다스리라고 명하였으나,힐리(가한) 역시 병사를 거느리고 변경을 엿보았다. 어느 누가 옛 장성을 (다시) 건축하고,백성을 뽑아 변경을 지키자고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돌궐은 한 여름인데도 서리가 내리고,다섯개의 태양이 같이 떠올라,3달동안 계속 밝아,붉은 기운이 들에 가득차,저들이 재앙을 보고도 덕을 닦기에 힘쓰지 않는 것은,하늘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곳에 일정한 데가 없고,6가지 가축은 대부분 죽었으며,땅을 이용할 수 없다. (돌궐의) 풍속은 죽으면 태우는데,지금은 장례를 지낼때 묘를 세워,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귀신을 업신여긴다. 돌리(가한)과 화목하지 못하고,안으로 서로 공격하고 해쳐서,친족과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네가지가 있어서,(돌궐은) 장차 망할 것이고,마땅히 공 등이 잡을 것인데,어찌 장새를 쌓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돌궐의 풍속은 평소 질박하고 간단한데,힐리(가한)이 중국 선비 조덕언을 얻자,그 사람이 재능이 있다고 여겨,믿고 맏기니,점점 나라(의 권력을) 전단하였다; 또 정치를 여러 호(胡)에게 맏겨,종족을 쓰지 않고 배척하고 멀리하고,군대를 일으켜 해마다 (중국)변경에 들어오니,부하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호(胡)의 성격이 물끓듯 하여,여러번 (말을) 번복하고 믿을 수가 없고,명령하는 것도 일정치 않았다. 해마다 크게 굶주렸으나,거두어들이는 게 가혹하고 무거워 여러 부족들이 점점 더 배반하였다.

明年,突利自陳為頡利所攻,求救。帝曰:「朕與頡利盟,又與突利有昆弟約,不可不救,奈何?」兵部尚書杜如晦曰:「夷狄無信,我雖如約,彼常負之,今亂而擊之,侮亡之道也。」乃詔將軍周範壁太原經略之,頡利亦擁兵窺邊。或請築古長城,發民乘塞。帝曰:「突厥盛夏而霜,五日並出,三月連明,赤氣滿野,彼見災而不務德,不畏天也。遷徙無常,六畜多死,不用地也。俗死則焚,今葬皆起墓,背父祖命,嫚鬼神也。與突利不睦,內相攻殘,不和於親也。有是四者,將亡矣,當為公等取之,安在築障塞乎?」突厥俗素質略,頡利得華士趙德言,才其人,委信之,稍專國;又委政諸胡,斥遠宗族不用,興師歲入邊,下不堪苦。胡性冒沓,數翻覆不信,號令無常。歲大飢,裒斂苛重,諸部愈貳。

또 다음 해(629년),(돌궐에) 속해 있던 부족 설연타가 자칭 가한이라고 하며,사신을 보내왔다. 조서로 병부상서 이정으로 하여금 마읍(에 있는) 오랑캐를 치라고 명하니,힐리(가한)이 달아나고,9명의 사근이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으며,발야고 복골 동라 (등) 여러부족과 습(霫), 해(奚)의 우두머리가 다 내조하였다. 이에 조서로 병주도독 이세적은 통막도로 나가고,이정은 정양도로 나가며,좌무위대장군 시소는 금하도로 나가고,영주대도독 임성왕 (이)도종은 대동도로 나가며,유주도독 위효절은 긍안도로 나가고,영주도독 설만숙은 창무도로 나가,모두 6총관,군사 10여만이,모두 (이)정의 통제를 받아 토벌하록 하였다. (이)도종은 영주에서 싸워,사람과 가축을 사로잡은 게 만을 헤아렸으며,돌리(가한)과 욱사설、음내특륵(특근)이 거느리는 소속 부락이 도망쳐 오고,승전보가 낮이나 밤이나 도착하니,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왕년에 국가가 처음 평정되었을 때,태상황이 백성들 때문에,돌궐을 받들면서,거짓으로 신하를 칭하였는데,짐은 늘 마음이 아프고 골치가 아파,천하의 수치심을 한번에 쓸어버리겠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하늘이 여러 장군들을 가르쳐,향하는 곳마다 번번히 이기니,짐은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又明年,屬部薛延陀自稱可汗,以使來。詔兵部尚書李靖擊虜馬邑,頡利走,九俟斤以眾降,拔野古僕骨同羅諸部、霫奚渠長皆來朝。於是詔幷州都督李世勣出通漠道,李靖出定襄道,左武衞大將軍柴紹出金河道,靈州大都督任城王道宗出大同道,幽州都督衞孝節出恆安道,營州都督薛萬淑出暢武道,凡六總管,師十餘萬,皆授靖節度以討之。道宗戰靈州,俘人畜萬計,突利及郁射設、蔭奈特勒帥所部來奔,捷書日夜至,帝謂羣臣曰:「往國家初定,太上皇以百姓故,奉突厥,詭而臣之,朕常痛心病首,思一刷恥於天下,今天誘諸將,所向輒克,朕其遂有成功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