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5, 당나라때-29 (9.신당서 돌궐전⑥)

상 상 2014. 3. 3. 17:59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5, 당나라때-29 (9.신당서 돌궐전⑥)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9. 신당서 권215 돌궐전⑥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上

 

2) 번역문 출처: 중국정사외국전 중 신당서 외국전(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ndex.do)

※번역문이 있는 곳: 위 홈페이지/ 도서/ 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

 

☆ 이 부분은 번역 원문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번역 한 것임.

번 역 문

원 문

(무덕)7년,원、삭의 두 주(州)를 공격하고,대주의 땅에 들어왔으나,승리하지 못하자,다시 (원)군장과 연합하여 농주와 음반성을 공격하고,(군대를) 나누어 병주의 땅을 치니,진왕과 제왕 원길이 빈주도에 주둔하여 오랑캐를 대비하였다. (원)군장과 오랑캐가 원、삭、흔、병주의 땅에 드나들며,약탈하고 소란을 피우다가,몇번씩 여러 장수들에게 쫒겨났다. 그 8월,힐리와 돌리(가한)이 같이 군대를 일으켜,원주에서 부대를 합쳐 남쪽으로 오니,(그들이) 있는 곳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떨어,진왕과 제왕이 막았다.

七年,攻原、朔二州,入代地,不勝,更與君璋合攻隴州及陰槃城,分擊幷地,秦王與齊王元吉屯豳州道以備胡。君璋與虜出入原、朔、忻、幷地,剽係騷然,數為諸將驅逐。其八月,頡利與突利兵悉起,自原州連營而南,所在震恐,秦王、齊王拒之。

애초에,관중에 장마로 큰 비가 와서,군량(軍糧) 길이 끊어져,군대가 다음 차례로 빈주에 갔는데,가한이 만명의 기병으로 갑자기 도착하여,오룡판에 진을 치고,수백 기병으로 싸움을 거니,모든 군대가 크게 놀랐다. 진왕이 백명의 기병(을 데리고) 달려서 진을 스치고,큰 소리로 말하기를:「(우리)국가는 돌궐에게 빚이 없는데,어찌하여 깊이 침입하였소?나,진왕이요,왔으니 나와 가한이 결판 합시다,만약 굳이 싸우고자 한다면,나는 겨우 백명의 기병 뿐인데,무리를 많이 살상하는 것은,이익이 없기 때문이오.」라고하였다. 힐리(가한)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또 말을 달려 돌리(가한)에게 말하기를:「너는 왕년에 나와 동맹을 맺고,급한 재난은 서로 돕기로 하였는데,지금 약속했던 마음(香火之情)이 없어졌는가? 한번 결판 할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돌리(가한)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장차 막 물을 (건너) 나아가려고 하자,힐리(가한)이 병사가 적을 것을 보고,또 힐리(가한)과 말하는 것을 듣고,몰래 서로 시기하여,즉시 사자를 보내, 와서 말하기를:「왕은 걱정하지 마시오,나는 굳이 싸우려고 한 게 아니고,장차 왕과 함께 일을 의논하려고 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진왕이 반간계를 쓰자,돌리(가한)이 귀순할 마음으로,싸우고자 하지 않았으며,힐리(가한) 역시 억지로 하게할 마음이 없어서,이에 돌리(가한)과 협필특륵(특근) 사마를 보내 화친을 청하니,황제가 허락하였다. 돌리(가한)은 마침내 스스로 (진)왕에게 의탁하여 형제가 되었다. 황제가 사마를 보고,끌어당겨 황제 의자에 앉게 하니,사마가 머리를 숙이며 사양하자,황제가 말하기를:「내가 힐리(가한)을 보는 것 같소.」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받아들였다.

初,關中霖潦,饟道絕,軍次豳州,可汗萬騎奄至,陣五龍坂,以數百騎挑戰,舉軍失色。秦王馳百騎掠陣,大言曰:「國家於突厥無負,何為深入?我,秦王也,故來自與可汗決,若固戰,我纔百騎耳,徒廣殺傷,無益也。」頡利笑不答。又馳騎語突利曰:「爾往與我盟,急難相助,今無香火情邪?能一決乎?」突利亦不對。王將絕水前,頡利見兵少,又聞與突利語,陰相忌,即遣使者來曰:「王毋苦,我固不戰,將與王議事耳。」於是引却。秦王縱反間,突利乃歸心,不欲戰,頡利亦無以彊之,乃遣突利及夾畢特勒思摩請和,帝許之。突利遂自託於王為昆弟。帝見思摩,引升御榻,思摩頓首辭,帝曰:「我見若猶頡利也。」乃聽命。

돌궐이 이미 해마다 변경을 도둑질하자,어떤 자가 황제를 설득하여 말하기를:「오랑캐가 여러번 안으로 침구한 것은,정부의 창고와 자녀가 있기 때문이니,우리가 장안을 떠날 수 있다면,오랑캐의 마음은 그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중서시랑 우문사급으로 하여금 남산을 넘어,번(주)와 등(주)를 조사하러 가며,장차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서울 옮기는 것을 찬성하였지만,진왕이 홀로 말하기를:「이적(夷狄)은 옛부터 중국의 근심이었지만,주나라와 한나라가 서울을 옮겼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데 몇 년만 빌려주신다면,가한을 잡아 보답하겠음을 청합니다.」황제가 이에 (천도 논의를) 그쳤다. 힐리(가한)은 이미 화친하였고,또 때마침 계속해서 비가 많이 와,활과 화살이 모두 풀어져 못쓰게 되자,마침내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황제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변경을 방비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장작대장 우균이 오원과 영무에 (있는) 황하에 수군을 설치하여,그 침입을 막기를 청하였다. 중서시랑 온언박이 말하기를:「위나라는 긴 구덩이를 파서 흉노를 막았으니,지금 사용할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상현화로 하여금 변경의 큰 길에 구덩이를 파고,강남의 배 반드는 사람을 불러 갑자기 전함을 많이 만들게 하였다. 힐리(가한)이 사신을 보내 와서,북루관에서 호시를 하겠다고 원하자,황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때) 황제는 비로소 천하를 다 가져,12군(軍)을 없애고,문치를 숭상하고자 하였으나,이때에 이르러 돌궐의 근심이 한창 벌어져,이에 다시 (12군을) 설치하여,보병을 훈련하고 기병을 모아들였다.

突厥既歲盜邊,或說帝曰:「虜數內寇者,以府庫子女所在,我能去長安,則戎心止矣。」 帝使中書侍郎宇文士及踰南山,按行樊、鄧,將徙都焉。羣臣贊遷,秦王獨曰:「夷狄自古為中國患,未聞周、漢為遷也。願假數年,請取可汗以報。」帝乃止。頡利已和,亦會甚雨,弓矢皆弛惡,遂解而還。帝會羣臣問所以備邊者,將作大匠于筠請五原、靈武置舟師於河,扼其入。中書侍郎溫彥博曰:「魏為長塹遏匈奴,今可用。」帝使桑顯和塹邊大道,召江南船工大發卒治戰艦。頡利遣使來,願款北樓關請互市,帝不能拒。帝始兼天下,罷十二軍,尚文治,至是以虜患方張,乃復置之,以練卒蒐騎。

 

(무덕)8년,힐리(가한)이 영(주)、삭(주)를 공격하고 대주도독 인모와 신성에서 싸웠으나,(인)모가 패배하였다. 이에 장근의 병사는 석령에 주둔하고,이고천은 대곡에 주둔하고,진왕은 포주도에 주둔하였다.애초에,황제는 돌궐을 대접할 때 국력이 비슷한 나라에 대한 예를 사용하였는데,이렇게 되자,분노하며 말하기를:「예전에 나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오랑캐(돌궐)에게 후하게 (대접하여) 우리나라 변경 (문제를) 풀려고 하였다. 지금 마침내 (돌궐이) 약속을 무너뜨렸으니,짐은 장차 (돌궐을) 쳐서 멸망시키고,당연히 일을 적당히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담당 관리로 하여금 (돌궐에게)주는 문서(文書)를 조(서) 또는 칙(서)로 고치라고 명하였다.(장)근이 주둔지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오랑캐(돌궐)은 이미 석령을 넘어,병주를 포위하고,영주를 공격하며,노(주)와 심(주)를 돌아다니며 어지럽혔다. 이정이 병사를 데리고 노주도로 출발하고,행군총관 임괴는 태행(산)에 주둔하였다. (장)근이 대곡에서 싸웠으나,패배하고,중서시랑 온언박은 적에게 항복했으며,운주도독 장덕정은 죽었다. 마침내 광무(현)를 공격하였는데,임성왕 (이)도종이 격파하였다. 그(돌궐) 욕곡설은 수주를 노략질한 뒤,화친을 청하고 (물러)갔다. (돌궐이) 병주 여러 현을 패배시키고,난(주)、선(주)、팽주의 여러 (당나라)주둔지에 들어왔을 때에는,혹 작은 승리는 있었으나,(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잠시후 원주에 침구하였으나,절위장군 양둔이 격파하였고,또 (양둔은) 군사를 일으켜 대곡에 주둔하였다.

八年,頡利攻靈、朔,與代州都督藺戰新城,敗績。於是張瑾兵屯石嶺,李高遷屯大谷,秦王屯蒲州道。初,帝待突厥用敵國禮,及是,怒曰:「往吾以天下未定,厚於虜以紓吾邊。今卒敗約,朕將擊滅之,毋須姑息。」命有司更所與書為詔若敕。瑾未至屯,虜已踰石嶺,圍幷州,攻靈州,轉擾潞、沁。李靖以兵出潞州道,行軍總管任瓌屯太行。瑾戰大谷,敗績,中書侍郎溫彥博陷于賊,鄆州都督張德政死之。遂攻廣武,為任城王道宗破。其欲谷設掠綏州,請和去。敗幷州數縣,入蘭、鄯、彭州諸屯,或小勝,不能制。俄寇原州,折威將軍楊屯擊之,且發士屯大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