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4, 당나라때-28 (9.신당서 돌궐전⑤)

상 상 2014. 2. 27. 17:33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4, 당나라때-28 (9.신당서 돌궐전⑤)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9. 신당서 권215 돌궐전⑤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上

 

2) 번역문 출처: 중국정사외국전 중 신당서 외국전(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ndex.do)

※번역문이 있는 곳: 위 홈페이지/ 도서/ 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

 

☆ 이 부분은 번역 원문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번역 한 것임.

번 역 문

원 문

힐리(가한이) 처음 막하돌설이 되었을때,아(아장: 궁정)을 오원 북쪽에 설치하였다。설거가 평량을 함락하고,(돌궐)과 화친을 맺자,(황)제가 근심하여,광록경 우문흠을 보내 힐리(가한)에게 뇌물을 주고,(설)거와 (관계를) 끊게 하였다;수나라 오원태수 장장손이 소속 부락 다섯 성을 들어 오랑캐(돌궐)에 붙으니,(우문)흠이 아울러 오원의 땅을 돌려주도록 설득하였다. (힐리가한이) 모두 받아들이고,또 군대를 출발시켜 (장)장손의 소속 부락과 함께 진왕(이세민)의 군대와 만났다. 태자 건성이 풍주를 폐지하고,아울러 유중의 땅을 잘라 줄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처라(가한)의 아들 욱사설이 소속 부락 만개의 장막(帳幕: 천막)을 데리고 하남에 들어와 거처하며,영주를 요새로 만들었다.

頡利始為莫賀咄設,牙直五原北。薛舉陷平涼,與連和,帝患之,遣光祿卿宇文歆賂頡利,使與舉絕;隋五原太守張長遜以所部五城附虜,歆幷說還五原地。皆見聽,且發兵舉長遜所部會秦王軍。太子建成議廢豐州,幷割榆中地。於是處羅子郁射設以所部萬帳入處河南,以靈州為塞。

 

힐리(가한)이 또 의성(공주)를 처로 삼고,시필(가한)의 아들 십발필을 돌리가한으로 삼아,동쪽에 거주하게 하였다. 의성(공주)는,양해의 딸인데,그 동생 선경 역시 돌궐에 의지하게 되자,왕세충의 사자(使者) 왕문소와 함께 힐리(가한)을 설득하여 말하기를:「예전에 계민(가한)의 형제들이 나라를 (두고) 다투었는데,수나라에 의지하여 다시 (가한의) 지위를 얻었으며,자손은 나라를 가졌습니다. 지금의 천자는 (수)문제의 후손이 아니니,마땅히 (양)정도를 세워 수나라의 후덕한 은덕에 보답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힐리(가한)이 그렇다고 여겼으며,이러한 연고로 해마다 (변경 안으로) 들어와 침구하였다. 그러나 (힐리가한은) 아버지와 형이 남긴 물자가 넉넉하고,병사들은 날래고 용감하였으며 말은 많을 뿐만 아니라,거만하고 교만한 태도는,모든 야만족 위에 군림할 만 했으며,중국이 (자기들과) 상대하기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에,편지에 쓰인 글은 불손하고 내리 깔보았음에도,대다수 (물건은) 당연히 구하였다. (황)제는 이제 막 천하를 공략하여 점령하고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굴욕스러운 예의로,많이 베풀고 바쳐서,(더 이상)보낼 물품이 없었는데도,끝없는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頡利又妻義成,以始畢子什鉢苾為突利可汗,使居東。義成,楊諧女也,其弟善經亦依突厥,與王世充使者王文素共說頡利曰:「往啟民兄弟爭國,賴隋得復位,子孫有國。今天子非文帝後,宜立正道以報隋厚德。」頡利然之,故歲入寇。然倚父兄餘資,兵銳馬多,謷然驕氣,直出百蠻上,視中國為不足與,書辭悖嫚,多須求。帝方經略天下,故屈禮,多所舍貸,贈賚不貲,然而不厭無厓之求也。

(무덕)4년(621년),힐리(가한)이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원군장과 연합해 안문을 침구하니,정양왕 이대은이 격퇴시켰다. 힐리(가한)이 우리 사자(使者) 한양공 (이)괴、태상경 정원숙、좌효위대장군 장손순덕을 잡아두니,(황)제 역시 (그에) 상당하는 그들의 사신을 가두었다. 이로인해 대주를 침구하여,행군총관 왕효기를 패배시키고,하동을 노략질 하였으며,원주를 침범하고,연주 요새를 뚫고,여러 장수들과 싸움을 벌렸으나,사로잡을 수 없었다.

四年,頡利率萬騎與苑君璋合寇鴈門,定襄王李大恩擊却之。頡利執我使者漢陽公瓌、太常卿鄭元璹、左驍衞大將軍長孫順德,帝亦囚其使與相當。由是寇代州,敗行軍總管王孝基,略河東,犯原州,穿延州塞,諸將與戰,不能有所俘。

다음해(622년),순덕 등을 돌려보내며,또 화친을 청하여,예물로 민어의 부레를 끓여서 만든 풀을 주면서,속여 말하기를:「두나라의 우호관계를 단단하게 하고자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비록 믿지 않았으나,그 사신 특륵(특근) 열한 등을 석방하고,금과 함께 후한 (물품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대은이 말씀 올리기를:「돌궐이 굶주려,마읍을 도모할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로 전중소감 독고성에게 (이대은과) 함께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독고)성이 약속보다 늦자,(이)대은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신성에 주둔하였다. 힐리(가한)이 몸소 수만 기병을 거느리고 유흑달과 합하여 (신성을) 포위하니,(이)대은이 죽고,병사들도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흔주로 진격하여,이고천에게 격파되었다. (유)흑달이 돌궐 만명을 데리고 산동(山東)을 어지럽히고,또 정주를 해쳤다. 힐리(가한)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이에 15만 기병을 거느리고 안문에 들어와,병주를 포위하고,깊이 분(주)와 노(주)를 노략질하여,남녀 5천(명)을 손에 넣고,수천 기병을 나누어 원(주)와 영(주) 사이를 돌며 약탈하게 하였다. 이에 태자 건성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빈주도로 나아가고,진왕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주도로 나아가 공격하며;이자화가 병사들을 데리고 운중으로 달려가,불시에 (힐리)가한의 뒤를 치고;단덕조가 하주로 나아가,그 돌아가는 길을 노렸다. 병주총관 양읍왕 (이)신부가 분(주) 동쪽에서 싸워,오랑캐 5백명의 목을 베고,말 2천(필)을 손에 넣었으며;분주자사 소의헌은 5천(명)을 사로잡았다. 오랑캐들은 대진관을 함락하고,병사들을 풀어 홍주를 약탈하니,총관 우문흠과 영주의 양사도가 막고,말과 낙타 수천(두)를 얻었다. 힐리(가한)은 진왕이 또 온다는 소식을 듣고,(군사를) 이끌고 변방을 나가니,(우리)군대도 돌아왔다.

明年,還順德等,且請和,贄魚膠,紿云:「固二國之好也。」帝雖未情,釋其使特勒熱寒等,厚與金還之。大恩上言:「突厥飢,馬邑可圖也。」詔殿中少監獨孤晟共擊之。晟後約,大恩不敢進,屯新城。頡利自將數萬騎與劉黑闥合圍之,大恩沒,士死者數千人。進擊忻州,為李高遷所破。黑闥以突厥萬人擾山東,又殘定州。頡利未得志,乃率十五萬騎入鴈門,圍幷州,深鈔汾、潞,取男女五千,分數千騎轉掠原、靈間。於是太子建成將兵出豳州道,秦王將兵出蒲州道擊之;李子和以兵趨雲中,掩可汗後;段德操出夏州,狙其歸。幷州總管襄邑王神符戰汾東,斬虜五百首,取馬二千;汾州刺史蕭顗獻俘五千。虜陷大震關,縱兵掠弘州,總管宇文歆、靈州楊師道拒之,獲馬、橐它數千。頡利聞秦王且至,引出塞,王師還。

또 그 다음해(623년),(유)흑달、(원)군장 등이 여러번 정、광、원、삭 등의 주(州)에 침입하여,주둔 장수와 서로 승부를 겨뤘다. 황제는 태자 건성을 보내 다시 북쪽 변경에 주둔케하고、진왕을 병주에 주둔시켜 오랑캐에 대비하였으나,오래지 않아 그만 두었다. 잠시 후 또 (돌궐이) 대주의 땅에 있는 한 주둔지를 격파하고,위、빈 두 주(州)에 진격하여,마읍을 빼앗고,갖지 아니하면서,다시 화친을 청하며,우리의 마읍을 돌려보냈다.

又明年,與黑闥、君璋等小小入寇定、匡、原、朔等州,與屯將相勝負。帝遣太子建成復屯北邊、秦王屯幷州備虜,久乃罷。俄又破代地一屯,進擊渭、豳二州,取馬邑,不有也,復請和,歸我馬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