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9, 당나라때-33 (9.신당서 돌궐전⑩)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9. 신당서 권215 돌궐전⑩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上
2) 번역문 출처: 신당서 외국전(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ndex.do)
※번역문이 있는 곳: 위 홈페이지/ 도서/ 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
☆ 이 부분도 번역 원문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번역 한 것임.
번 역 문 |
원 문 |
힐리(가한)이 집에서 살지 못하고,늘 천막 궁정(宮廷) 안에서 부끄러워 하였는데,오래동안 답답하고 스스로 의지하지 못하여,집안 사람들과 함께 슬픈 노래를 부르며 서로 눈물을 떨어뜨려,모습이 야위고 말라갔다. 황제가 보고 불쌍히 여겨,괵주의 부산에 노루와 고라니가 많으니,사냥하는 오락을 가지라고,이에 자사의 직책을 부여하였으나,사양하고 가지 않으니,마침내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좋은 논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옛날 계민(가한)이 나라를 잃어,수문제가 곡식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관리와 백성을 일으켜,(군)영을 보호해서 존립하였는데,시필(가한)에 이르러 점점 강해지더니,즉시 병사로 (수)양제를 안문에서 포위하였으나,지금은 멸망한 자가 된 것은,반드시 덕을 배반하고 의(義)를 잊은 것이 불러온 것 아닌가?」라고 하였다. 힐리(가한)의 아들 첩라지는,지극한 품성을 갖고 있어서,서울에 살게된 이후에,여러 부인들이 물품을 제공받았으며,나지도 참여했다(받았다);그 어머니는 가장 는제 도착하여,공급을 받지 못하니,나지가 감히 공급된 고기를 맛보지 못하였다. 황제가 듣고,탄식하며 말하기를:「하늘이 준 인자함과 효성에는,중국인과 야만인의 구분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후하게 (물품을) 주고,마침내 어미에게도 고기를 주었다. |
頡利不室處,常設穹廬廷中,久鬱鬱不自憀,與家人悲歌相泣下,狀貌羸省。帝見憐之,以虢州負山多麕麋,有射獵之娛,乃拜為刺史,辭不往,遂授右衞大將軍,賜美田宅。帝曰:「昔啟民失國,隋文帝不恡粟帛,興士眾,營護而存立之,至始畢稍彊,則以兵圍煬帝鴈門,今其滅者,殆背德忘義致然耶?」頡利子疊羅支,有至性,既舍京師,諸婦得品供,羅支預焉;其母最後至,不得給,羅支不敢嘗品肉。帝聞,歎曰:「天稟仁孝,詎限華夷哉!」厚賜之,遂給母肉。 |
(정관)8년,힐리(가한)이 죽자,귀의왕을 추증하고,시호를 황이라고 하였으며,명하기를 나라 사람에게 장사를 치르되,그 (나라의) 예법에 따라,시신을 불에 태우고,파(수) 동쪽에 무덤을 세우게 하였다. 그 신하 호록달관 토욕혼사라는 자는,힐리(가한)의 어머니 파시(씨)의 가신인데,힐리(가한)이 처음 태어나자,(토욕)혼사에게 주어 (키웠는데),이때에 이르러 애통해하며,자살하였다. 황제가 기이하게 여겨,중랑장을 추증하고,힐리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도록 명하고,조서로 중서시랑 잠문본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힐리(가한)과 (토욕)혼사의 묘비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잠시 후 소니실 역시 순사하였다. (소)니실이라는 자는,계민가한의 아우이다. 시필(가한)이 사발라설로 삼아,천막 부락 5만(을 주어),아(장:궁정)을 영주 서북에 (세우게 하고),모습이 씩씩하고 용감하고,인의와 은혜로 아랬 사람을 다루니,사람이 많이 몸을 의탁하였다.;힐리정난(頡利政亂) 때,그 부락 홀로 배신하지 않았다. 돌리(가한)이 항복하자,힐리(가한)은 (그를) 작은 가한(小可汗)으로 삼았다. 힐리(가한)이 패하게 되자,이에 무리를 들고 투항하여,고비사막 남쪽의 땅은 마침내 비게 되자,북녕주도독、우위대장군을 제수하였으며,회덕왕을 책봉하였다고 한다. |
八年,頡利死,贈歸義王,謚曰荒,詔國人葬之,從其禮,火尸,起冢灞東。其臣胡祿達官吐谷渾邪者,頡利母婆施之媵臣也,頡利始生,以授渾邪,至是哀慟,乃自殺。帝異之,贈中郎將,命葬頡利冢旁,詔中書侍郎岑文本刻其事于頡利、渾邪之墓碑。俄蘇尼失亦以死殉。尼失者,啟民可汗弟也。始畢以為沙鉢羅設,帳部五萬,牙直靈州西北,姿雄趫,以仁惠御下,人多歸之;頡利政亂,其部獨不貳。突利降,頡利以為小可汗。頡利已敗,乃舉眾來,漠南地遂空,授北寧州都督、右衞大將軍,封懷德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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