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08, 당나라때-32 (9.신당서 돌궐전⑨)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9. 신당서 권215 돌궐전⑨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上
2) 번역문 출처: 중국정사외국전 중 신당서 외국전(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ndex.do)
※번역문이 있는 곳: 위 홈페이지/ 도서/ 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
☆ 이 부분도 번역 원문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번역 한 것임.
번 역 문 |
원 문 |
(정관)4년 정월,(이)정이 전진해서 악양령에 주둔하여,힐리(가한)을 야간에 습격하니,힐리(가한)이 놀라,아(장)을 적구로 물리니,(돌궐의) 큰 우두머리 강소밀 등이 수나라 소황후와 양정도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인이 늘 황후와 몰래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하여,중서사인 양문관이 죄를 캐묻자고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천하가 아직 하나가 되지 아니하여,사람들이 혹 수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며,지금 반란한 측도 이미 안정시켰는데,어찌 죄를 따질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제쳐)두고 캐묻지 않았다. 힐리(가한)이 (계책이) 막혀,보철산으로 달아났으나,병사는 여전히 수만이었는데,집실사력으로 하여금 내조하도록 명하여,거짓으로 불쌍한 말로 사죄하고,속국이 되겠다고 청하니,황제가 홍려경 당검과 장군 안수인 등으로 하여금 증표를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달래도록 명하였다. (이)정은 (당)검이 오랑캐가 있는 곳에 있으니,오랑캐가 반드시 안심하리라는 것을 알고,이에 습격하여,그 무리를 다 빼앗으니,힐리(가한)이 천리마를 얻어,홀로 사발라로 달아났는데,행군부총관 장보상이 사로잡았다. 사발라설 소니실이 무리를 들어 항복하니,그 나라가 마침내 망하여,다시 양(주)와 긍(주)를 평정해서 안전한 땅이 되니,경계가 대사막(고비사막)에 이르렀다. |
四年正月,靖進屯惡陽嶺,夜襲頡利,頡利驚,退牙磧口,大酋康蘇蜜等以隋蕭皇后、楊正道降。或言中國人嘗密通書於后,中書舍人陽文瓘請劾治。帝曰:「天下未一,人或當思隋,今反側既安,何足治耶?」置勿劾。頡利窘,走保鐵山,兵猶數萬,令執失思力來,陽為哀言謝罪,請內屬,帝詔鴻臚卿唐儉、將軍安脩仁等持節慰撫。靖知儉在虜所,虜必安,乃襲擊之,盡獲其眾,頡利得千里馬,獨奔沙鉢羅,行軍副總管張寶相禽之。沙鉢羅設蘇尼失以眾降,其國遂亡,復定襄、恆安地,斥境至大漠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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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리(가한)이 서울에 도착하자,포로를 태묘에 아뢰고,황제가 순천루에 나아가,의장대와 시위대를 늘어놓고,관리와 백성들이 마음대로 살펴보게 한 가운데,관리들이 가한을 잡아 도착하니,황제가 말하기를:「(너의) 죄가 다섯이다.:아버지는 나라가 파괴되어,수나라에 힘입어 안정하였는데,화살촉 하나도 돕지않고,그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음이,그 하나요;우리나라와 인접하였는데 신의를 버리고 변경을 어지럽혔음이,그 둘이며;군대를 믿고 전쟁을 그치지 않아,부락이 원망을 품게 한 것이,그 셋이고;중국 백성을 상하게 하여,농사짓기를 해친게,그 넷이고;화친을 허락했음에도 옮겨다니고 시간을 끌며 스스로 달아난게 ,그 다섯이다. (그러므로) 짐이 너를 죽이는게 명분 없는 일이 아니나,돌아보건데 위수 가에서 (맺은) 동맹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으므로,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가족을 다 돌려주고,태복(시)에서 묵게 하였으며,식량을 내려 주었다. |
頡利至京師,告俘太廟,帝御順天樓,陳仗衞,士民縱觀,吏執可汗至,帝曰:「而罪有五:而父國破,賴隋以安,不以一鏃力助之,使其廟社不血食,一也;與我鄰而棄信擾邊,二也;恃兵不戢,部落攜怨,三也;賊華民,暴禾稼,四也;許和親而遷延自遁,五也。朕殺爾非無名,顧渭上盟未之忘,故不窮責也。」乃悉還其家屬,館于太僕,稟食之。 |
사결사근이 4만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으며,가한의 아우 욕곡설은 고창으로 달아났다가,얼마 안있어 역시 투항하였다. 이오성의 장은 평소 돌궐의 신하로써 (돌궐을) 섬겼으나,일곱 성을 들어 바치자,그 땅을 서이주로 만들었다. (황제가) 조서로 명하였다.:돌궐이 전염병을 만나,장성의 남쪽에,해골이 산같이 쌓여 드러나 있으니,담당 관원은 술과 포로 제사를 지내고,매장하라. 또 명하였다.:수나라 (말기) 혼난할 때,중국 백성이 많이 오랑캐(돌궐)에게 (돌궐의 노예로) 몰락하였으니,사자(使者)를 보내 금과 비단으로 남녀 8만명을 사서,다시 평민으로 되돌리도록 하라. |
思結俟斤以四萬眾降,可汗弟欲谷設奔高昌,既而亦來降。伊吾城之長素臣突厥,舉七城以獻,因其地為西伊州。制詔:突厥往逢癘疫,長城之南,暴骨如丘,有司其以酒脯祭,為瘞藏之。又詔:隋亂,華民多沒于虜,遣使者以金帛贖男女八萬口,還為平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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