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물고 물리는 亂打 민주주의

상 상 2014. 2. 18. 17:31

 

출처: 조선일보, 입력 : 2014.02.18 05:49

 

입법·사법·행정 공무원들 제 분수 넘어 폭언과 쌍욕

외부와 '정치적 同業' 해도 上部는 눈치만 보고 묵인

與野는 "더 해라" 부추겨… '권은희 신드롬' 계속될 것

 

현직 경찰관이 정치인처럼 기자회견을 열어 사법부의 판결을 나무란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재판 결과…." 현직 판사가 대통령을 향해 쌍욕을 날린다. "가카 XX 짬뽕…." 국회의원이 사법부가 제 뜻에 맞지 않는다고 폭언을 한다. "유신 사법부…." "다음에 또 그런 판결 나면 정권 퇴진…."

 

이런 걸 대체 무슨 민주주의라고 해야 하나? 삼권분립? 아니다. 삼권분립은 각자의 몫을 하라는 것이지 남의 몫을 욕보이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건 '난타(亂打) 민주주의'라 해야 맞을 듯싶다.

 

'난타 민주주의'가 생긴 까닭은 자명하다. 공직자들이 분수의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사법·행정 쪽보다 높다고 자만한다. "판검사? 누가 그렇게 판결하라고 했어?" "대통령, 당신이 그렇게 시킨 거지? 물러가라." 일부 법관은 통념의 잣대를 무시하고 자기 잣대대로 판결한다. "김일성 묘소 참배? 내 말이 법이다. 참배해도 좋다. 동방예의지국이니까." 일부 공무원은 아예 '속내직업'을 드러낸다. "나는 공무원 이전에 안티…."

 

입법·사법·행정 공직자들이 이렇듯 자기 분수를 넘는 것은 다 정치와 연관이 있다. 1987년의 민주화 이전엔 공직자들이 정치 끗발들의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분수를 넘었다. 1957년의 지방선거 때 전라북도 정읍의 경찰은 운반 중이던 투표함을 통째 바꿔치기해버렸다. 자유당 후보를 부정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라면 해야 하는 게 공무원이었기에 일선 경찰로서는 분수를 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 상층부야 물론 출세를 위해 공모했지만.

 

1987년의 민주화 이후엔 양상이 달라졌다. 이 시기엔 공무원 일부가 자발적으로 정치화(化)를 했다. 그리고 억지로가 아니라 자청해서 분수를 넘었다. 그들은 직분을 어기고 특정 정파와 손잡기, 손 내밀기, 줄 서기, 줄 대기를 했다. 경찰·검찰·정보기관·법조·행정 공무원 일부가 외부 집단들의 은밀한 내통자로, 정치운동의 공공연한 동업자로 발 벗었다. 이들은 각급 선거에서 공천이라도 받을까 해서, 줄 댄 쪽이 집권하면 높은 자리로 승진이라도 할까 해서 직장에서 습득한 정보를 넘겨주거나 음습한 공작 정치의 행동대 노릇을 했다. 정읍 투표함 바꿔치기를 폭로한 박재표 순경이 '양심적 제보자(whistle blower)'였다면, 이들은 반대급부를 노린 '기획가'라 할 수 있다.

 

이 '기획가'들의 모습은 근래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에서 실감 나게 간파할 수 있었다. 국정원 여직원에 대한 미행과 감금, 댓글 정국, 원세훈 공소장 변경, 채동욱 혼외 아들 의혹, 김용판·권은희 '총질' 등 모든 드라마에는 항상 여, 야로 쏠린 공무원들의 정치적 촉수(觸手)가 음모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무대 뒤 음모뿐만은 아니다. 정치화된 공무원들은 무대 전면(前面)에서도 '문화혁명'의 연기인(演技人) 노릇을 곧잘 했다. 일부 신진 세대 공무원들은 관직에 들어와서도 정치운동을 하기 위해 위장 취업이라도 했다는 양 시도 때도 없이 튀고, 좌충우돌하고, 저돌적으로 받고, 직장 질서를 깨고, 돌출 해프닝으로 관객의 이목을 끌려 했다. 전문직 종사자라기보다는 마치 무슨 스타라도 된 것 같은 우월 의식으로 들뜨고 기분 내는 모습이었다.

 

이런 처신은 공무원 각자가 자신의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제멋대로' 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공직 사회의 기회주의적인 상층부는 이런 럭비공 수하들을 딱 부러지게 다잡지 않고 적당히 지나치려 한다. 무사안일인 셈이다. 공직 상층부가 그러는 한 '권은희 신드롬'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난타 민주주의'를 여야 정치권이 더 해라, 더 해라 부추겨 왔다는 사실이다. 새누리당은 '광우병 투항' 이후 리더십을 내던지고 포퓰리즘을 껴안았다. 이런 맹물 집권당 아래에선 공무원의 정치화가 더 쉬울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김용판 무죄판결이 나자 '황교안 해임' '특검'을 들고 나왔다. 판검사들더러 자기들 입안의 혀처럼 놀라는 압박이었다.

 

근대 관료제는 위계질서, 매뉴얼에 따른 근무, 세분된 전문성, 비(非)인격성, 성과에 따른 인사(merit system) 등이다. 이런 발전한 관행을 우리도 B학점만큼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정치적 인사(spoil system)가 필요한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그럼 우린 뭘 먹고 살라느냐?"며 아우성칠지 모른다. 그러나 신경 쓸 것 없다. A학점은 아예 바라지도 않으니 말이다.

 

류근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