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 <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靺鞨)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의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 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
“과인(寡人)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몽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하였다. 땅이 좁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에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왕은 그 말을 [듣고]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2년 (서기전-BC 36) :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번역문]
2년(서기전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3년 (서기전-BC 35) : 황룡(黃龍)이 골령에 나타났다.
[번역문]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 (서기전-BC 34) :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번역문]
4년(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 (서기전-BC 32) : 행인국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번역문]
6년(서기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10년 (서기전-BC 28) : 북옥저를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번역문]
10년(서기전 28) 가을 9월에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14년 (서기전-BC 24) :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번역문]
14년 (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19년 (서기전-BC 19) : 유리가 부여로부터 어머니와 함께 도망 오니
[번역문]
19년 (서기전 19)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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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2. 해설 및 분석
1) 오늘 올리는 부분은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내용을 근간으로 우리민족 고유의 사서인 고기(古記)의 다른 기록을 더하여 썻고
중국사서에는 해당되는 기록이 없다.
2) 고구려 건국년도 문제
위에 나온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위서(魏書) 등 중국사서를 보면 고구려 건국년도가 없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서 인용한 구삼국사(舊三國史)에는 건국연도를 알수 있는 몇 개의 년도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건국년도를 구삼국사를 기초로 계산한 것임을 알수 있다.
구삼국사에 기록된 연도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계산해 보자.
구삼국사에 나타난 연대를 알수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신작(神雀)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②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莅
③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이러한 년도 기록에 따라서
먼저 주몽의 탄생년도를 기준으로 사망년도를 계산하여, 19년을 빼면,
주몽이 왕위애 오른 년도 즉,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순서로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부식도 이러한 방법으로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계산하였음)
첫째, 구삼국사(舊三國史)가 주몽의 탄생년도로 기록한 「신작(神雀) 4년」
신작은 중국 한나라 효선제때 쓴 연호인데 그때 쓴 연호를 보면,
...(상략)
원강(元康) 서기전 65년 ~ 서기전 61년
신작(神爵) 서기전 60년 ~ 서기전 58년
오봉(五鳳) 서기전 57년 ~ 서기전 54년
...(하략) 으로서 신작은 3년밖에 없다
따라서 신작 4년이라는 것을 오봉1년으로 보면 주몽의 탄생년도는 서기전 57년(전한 제10대 효선제)이다.
둘째, 주몽의 사망: 『40세』
신작 4년(서기전 57년)으로부터 40년이면 서기전 18년이나 삼국사기는 서기전 1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김부식은 신작이 3년까지만 있으므로 신작 4년은 신작 3년의 오기(誤記)로 보고
주몽의 탄생년도를 신작 3년(서기전 58년)으로 잡고 있음을 알수 있다.
(앞의 수는 서기전 년도, 괄호안의 수는 나이)
|
58(1) |
57(2) |
56(3) |
55 |
54 |
53 |
52 |
51 |
50 |
49(10) |
|
48(11) |
40 |
39 | |||||||
|
38(21) |
37(22) |
30 |
29 | ||||||
|
28(31) |
27(32) |
20 |
19(40) |
셋째, 왕위에 오른 년도(고구려 건국 년도):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莅』
주몽의 사망년도가 서기전 19년이고 그 사망년도가 왕위에 있은지 19년이면
왕위에 오른 때 즉, 고구려 건국년도는 서기전 37년이다.
(위에 있는 수는 재위년도, 아래 수는 서기전 년도)
|
1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37 |
36 |
35 |
34 |
33 |
32 |
31 |
30 |
29 |
28 |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
|
27 |
26 |
25 |
24 |
23 |
22 |
21 |
20 |
19 |
이와같은 방법으로 김부식은 주몽이 왕위에 오른 년도를 서기전 3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김부식은 이 서기전 37년을 고구려의 건국 년도로 보고,
이것을 근거로 거꾸로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구삼국사가 이미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축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김부식이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축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삼국사는 언제 저술되었는지 알수 없음 즉 언제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축소하였는지는 미상.
아마 신라시대에 이미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축소하여 고려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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