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64<수나라때,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3>

상 상 2013. 10. 14. 20:05

 

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 열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분석

5. 수서 고려전 분석

6.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6.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 자치통감 중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기록 분석

1) 자치통감을 읽을때 주의할 점.

2) 자치통감 수기2, 문제 개황17년(597년)기사

3) 자치통감 수기2, 문제 개황18년(598년) 기사

4) 자치통감 수기5, 양제 대업8년(612년) 기사

5) 자치통감 수기6, 양제 대업9년(613년) 기사

6) 자치통감 수기6, 양제 대업10년(614년) 기사 및 자치통감 수기7, 양제 대업 12년(616년) 기사

 

 

3) 자치통감 수기2, 문제 개황18년(598년)기사 분석

 

① 2월 조

이 부분은 수서 고조 본기 개황18년(598년) 2월 기사와 수서 고려전 개황18년 기사를 기본으로 하고

다른 사서를 보충하여 사실을 약간 더 자세하게 쓴 것이다.

세 개의 사서를 제시하여 직접 보도록 하자.

 

< 자치통감 >

598

개황18년 봄, 2월, 갑진일,황상이 인수궁에 행차하였다. 고려왕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구하여,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 (황)상이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을사일,한왕 (양)량、왕세적 모두 행군원수로 삼고,수륙 30만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으며,상서좌복야 고경을 한왕 장사로,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았다.

 

<수서 고조본기>

598

개황18년 2월 을사일,한왕 (양)량을 행군원수로 삼아,수륙 30만으로 고려를 정벌하였다.

 

<수서 고려전>

598

이듬해(개황18년)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 고조가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량(諒)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려를 치도록 명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폐지하였다.

 

 

② 6월 조(9월조 포함)

이 부분 역시 수서 고조 본기 개황18년 6월, 9월 기사와 수서 고려전 개황18년 기사를 기본으로 하고

다른 사서를 보충하여 사실을 좀더 쓴 것이나 춘추사관이 들어가 있다.

 

<자치통감>

598

6월 병인일(27일)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직과 작위를 없애도록 하였다. 한왕 양량의 군대는 임유관(하북성 무녕현 동부)을 나가자, 물이 불어나서 군량운반이 이어지지 않아 군사 내에 먹을 것이 모자라게 되고 다시 전염병을 만났다. 주라후는 동래(산동성 내주시)로부터 바다를 떠서 평양성으로 달려갔으나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대부분 표류하여 침몰하였다.

 

가을 9월 기축일(21일) 군대가 돌아왔는데 죽은 사람이 10에 8~9이었다. 고려왕 고원 역시 두려워하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려서 칭하기를‘요동 분토에 있는 신 원’이라하니 황상은 이에 군사를 철수하고 그를 대우함이 처음과 같았다.

 

<수서 고조본기>

598

6월 병인일,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폐지하였다.

9월 기축일,한왕 (양)량 군대가 전염병을 만나 되돌아왔는데,죽은 자가 10에 8, 9였다.

 

<수서 고려전>

598

이때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아 육군(六軍)의 먹을 것이 모자라고, 또 군사가 임유관을 나가서는 전염병마저 만나 군대가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군대가) 요수에 이르자, 원(영양왕)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황상에게 표문을 올려 칭하기를,‘요동 분토(糞土)의 신, 원’운운하였다. 황상은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니, 원도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자치통감을 보면 「군대가 돌아왔는데 10에 8~9이 죽었다」고 되어있는데

그런 군대에게 고구려 왕이  뭐가 두려워 사죄를 하고 ‘요동 더러운 땅에 있는 신’이라고 칭하겠는가?

 

쳐들어왔다가 몰살당한 군대에게 두려워하는 일도 있는가?

몰살당한 군대가 두려워 사죄하는 경우가 있는가?

승자가 자기를 더러운 땅에 있는 신하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리고 군대가 돌아왔다고 해놓고 고려왕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려서 군대를 철수 했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이렇게 앞뒤가 안 맞고 말도 안 되는 것을 글이라고 써 놓은 게 자치통감이다.

자치통감이 이렇게 엉터리가 된 것은 수서 본기와 수서 고려전을 짬뽕으로 뒤섞어 놓다보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글이 나온 것이고

그밖에 다른 사서도 적당히 섞어 싣되 중국인을 올리고 다른 민족을 내리 깎으려는 심보로 문장을 배열하다보니

이런 웃기는 글이 나온 것이다.

 

사실은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 때문에 군사의 80~90%가 죽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게 대패해서 군사의 80~90%가 죽은 것이고,

주라후가 바다로 평양에 갔으나 바람 때문에 배가 대부분 침몰한 게 아니고

고구려 해군에게 대패해서 배가 대부분 침몰한 것이 아니겠는가?

 

수나라의 수륙 양군 모두 고구려에게 참패하여 몰살당한 것이 창피하니

그것을 감추고 식량부족과 전염병 바람 탓으로 둘러댄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철저히 춘추필법으로 쓴 것이 자치통감이라고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