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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 열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분석
5. 수서 고려전 분석
6.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6.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자치통감 중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기록 분석)
1) 자치통감을 읽을때 주의할 점.
2) 자치통감 수기2, 문제 개황17년(597년)기사
3) 자치통감 수기2, 문제 개황18년(598년) 기사
4) 자치통감 수기5, 양제 대업8년(612년) 기사
5) 자치통감 수기6, 양제 대업9년(613년) 기사
6) 자치통감 수기6, 양제 대업10년(614년) 기사 및 자치통감 수기7, 양제 대업 12년(616년) 기사
4) 자치통감 수기5, 양제 대업8년(612년) 기사-2
② 3월 조
수서 양제 본기 대업8년(612년) 3월 기사가 조금 들어가 있고 수서 고려전 대업 7년(611년) 기사도 들어갔으나
대부분은 다른 사서를 참고하여 상황을 좀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철저히 자기네 중국 위주의 기술이 들어가 있다.
자치통감과 수서본기, 수서 고려전을 실제로 놓고 비교해 보면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수 있을 것이다.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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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3월,계사일,황상이 비로소 군대를 지휘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니, 여러 군대가 모두 모여, 물가에 다다라 큰 진을 이루었으나, 고려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좌둔위대장군 맥철장이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였다:「장부의 목숨은 스스로 있을 곳이 있는데 ,어찌 쑥으로 콧대에 뜸을 뜨고,참외 꼭지를 코에 뿜으며,열병을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다하여,아녀자의 수중(手中)에서 누워 죽을 수 있는가!」이에 자청하여 선봉이 되고,그 세 아들에게 말하였다.:「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지금이 죽는 날이다!내가 아름답게 죽을수 있다면,너희들은 당연히 부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황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 고려 군사들이 대규모로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가 접전하였다. 고려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전사웅 ·맹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니,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는데, 고려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하니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었다. 황제가 요수를 건너,갈살나 가한과 고창왕 백아를 전쟁을 살펴보는 곳으로 이끌어다가 그들을 두렵고 떨게하였으며,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
<수서 양제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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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3월 신묘일,병부상서、좌후위 대장군 단문진이 죽었다.
계사일,(황)상이 군대가 있는 곳에 갔다. 갑오일,군대가 요수 다리에 다달았다. 무술일,대군(大軍)이 적에게 막혀,생각한 바대로 건너지 못하였다. 우둔위대장군、좌광록대부 맥철장,무분랑장 전사웅、맹금차 등이,모두 죽었다. 갑오일,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넜다. 대전(大戰)이 (요수) 동쪽 연안에서 벌어져,적을 격파하고,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
<수서 고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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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대업 7년(611년) 제(帝)가 장차 원의 죄 토벌하려고, 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너, (황)상이 요동성에 군영을 설치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각기 병사를 그 성 아래로 정돈하였다. |
③ 5월 조
수서 양제 본기 대업8년(612년) 5월 기사를 기본으로 하여 좀더 자세한 수서 고려전 대업 7년(611년) 기사가
덧붙여져 있으며, 여기에 다른 사서를 참고하여 전투상황 기술을 첨가하고 있다.
역시 자치통감을 수서본기와 수서 고려전을 비교하면 확연히 알수 있을 것이다.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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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여름 5월 임오일,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갈 때 황제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지금 백성들을 조문하고 죄지은 자를 토벌하는 것이지,공명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러 장군들이 혹 짐의 뜻을 알지 못하고,병사들을 가벼이 갑자기 습격하게 하거나,고립된 군사로 홀로 싸워,일산상의 이름을 세우고 공훈을 구하는 것은,대군이 행동하는 법이 아니다. 공 등이 진군할 때,당연히 세 길로 나누어,공격할 곳이 있으면,반드시 세 길을 서로 알아야 하고,군사들을 가벼이 홀로 전진하여,종적을 일어버리기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군사의 모든 행동거지는,다 반드시 나에게 아뢰고 대답을 기다려야 하며,자기 혼자서 결단하여 행해서는 않된다.」요동(고구려)은 여러번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농성하며 굳게 지키니, 황제가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또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기를“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마땅히 어루만져서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를 풀지 말라.”고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황제에게) 달려가 아뢰도록 하였고, 회답이 올 때는, 성 안의 방어도 역시 갖추어져, 적절히 나와 막으며 싸웠다. 이와같이 두세 번을 거듭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여, 그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
<수서 양제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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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5월 임오일,지난 날 여러 장군이 각각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감히 기회에 따라 나아가지 못하였다. 곧 고려가 각각 성을 지키니,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
<수서 고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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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고려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막았으나, 전투가 다수 불리하자, 모두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帝)는 제군에 명하여 성을 공격케 하였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로,“고려가 만약 항복을 하면 바로 받아들이고, 군사를 풀어서는 않된다.”고 명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때, 적이 번번이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뜻에 따라 감히 기회를 이용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황제에게) 달려가서 아뢰도록 명령하였다. 회보가 도착할 무렵이면 적들이 수비를 역시 정비하고 적절히 나와서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 번을 되풀이하였으나 양제는 깨닫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량은 다하고 군사는 지친 데다, 군량 수송마저 이어지지 않아 모든 군대가 패전하니, 결국 후퇴하였다. |
④ 6월 조
수서 양제 본기 대업8년(612년) 6월 기사를 기본으로 하여 다른 사서를 참조하여 역사적 사실을 종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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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6월 기미일,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살펴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힐책하며 말하기를“공 등은 스스로 관직이 높고, 또 가문을 믿고서, 어리석고 나약함으로 나를 기다리려고 하였는가? 수도에 있을 때, 공 등은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병폐와 실패를 보일까 두려워하였을 뿐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공 등이 하는 것을 보고, 공들의 목을 베려고 할 뿐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이냐!”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얼굴빛을 잃었다. 황제가 이에 성의 서쪽 수 리 떨어진 곳에 머무르며, 육합성에 나아갔다. 고려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거느리니, 함대가 수백리에 걸쳤으며, 바다를 건너 먼저 전진하여,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와,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려 군사와 서로 맞닥뜨리자 진격하여 대파하였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그 성으로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부총관 주법상이 중지시키며, 여러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병 4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다. 고려는 나성 안의 빈 절 속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군사를 내어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니,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가, 군사를 풀어 약탈하니,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하였다. 복병이 나가니 [내]호아가 대패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병졸이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고려는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고려가 이에 물러갔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였으나, 다시는 감히 남아서 여러 군대와 호응해 접속하지 못하였다. |
<수서 양제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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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
6월 기미일,(황제가) 요동(성)에 행차하여,여러 장군에게화를 내며 질책하였다. (황제가) (요동)성 서쪽 수 리(數里)에 머무르며,육합성에 나아갔다. |
<수서 고려전>
: 해당사항 없음
⇒ 여기서 자치통감은 다른 사서를 참고하여 요동성 전투의 상황과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에서 대패한 사실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자치통감이 철저하게 중국 높이기와 타국 깎아 내리기의 춘추필법으로 썼음을 생각할 때
자치통감에 씌여 있는 것이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수나라 군대의 비참한 모습일 것이다.
사실 그대로를 썼다면 훨씬 더 비참한 참패의 모습이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