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61(수나라때, 수서 고려전 분석-3)

상 상 2013. 10. 4. 17:27

 

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분석

5. 수서 고려전분석

6.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5. 수서 고려전 분석-3

 

전에 미루에 두었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분석해 해보자...

④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 이것이 사실일까?

원(26대 영양왕)이 수나라에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하여 수나라 고조(문제)가 왕으로 책봉하였는가?

그리고 그 때문에 원(26대 영양왕)은 고구려 왕이 된 것인가?

 

위의 사항은 개황17년(597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수서 고려전에 씌여 있다.

 

우선 영양왕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영양왕은 고구려의 왕위 계승 법도에 따라 590년(년도 근거: 삼국사기)에 이미 왕이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7년이 지난 597년에 또다시 왕이 되겠다고 수나라에게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하겠는가?

즉, 고구려왕은 고구려 자체의 왕위 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되는 것이지

수나라의 책봉에 의해 고구려의 왕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증거는 삼국사기에 무수히 나오지만 수서 본기에서도 그 증거가 나온다.

 

수서 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를 보면

「고려왕 고양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즉 고양은 이미 고려왕 즉, 고구려 왕이다.

고구려 왕의 자격으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 임금은 수나라와 관계없이 이미 왕이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 임금은 고구려의 자체 왕위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된 것이지

수나라가 왕으로 책봉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개황18년(598년) 6월 병인일(수서 고조 본기) 영양왕이 말갈(靺鞨)의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에 침입하자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앴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작(官爵)은 ‘상개부 의동삼사’라는 관직과‘요동군 공’이라는 작위를 말한다.

 

무슨 말인가하면

수서 고려전 개황17년 조에 있는 기록

『아들 원(元)이 이어서 즉위하니, 고조는 사신으로 하여금 원에게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하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며 옷 한 벌 일체를 주었다.』에 있는 ‘상개부 의동삼사’라는 관직과‘요동군 공’이라는 작위를 없앴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제멋대로 부여한‘상개부 의동삼사’라는 관직과‘요동군 공’이라는 작위를 없앴다는 말이다.

그러한 관직과 작위는 수나라가 저 혼자 부여하고 저 혼자 붓장난을 한 것이니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없앴다고 말장난, 붓장난을 하든 말든 고구려와는 애초부터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수서 고조본기 개황18년(598년) 6월 병인일 조는 수서 고려전의 개황 18년 기록,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없앴다(下詔黜其爵位)」과 정확히 일치한다.

 

수서 고려전 개황18년의 기록 「下詔黜其爵位」를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라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고구려 왕의 왕위를 삭탈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 이후의 수서 고려전에는 고구려 임금의 이름만 나온다고 오해 할수 있게 한다.

그러나 「下詔黜其爵位」가 고구려 왕의 왕위를 제 마음대로 삭탈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왕위를 삭탈하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부른 기록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 후의 기록인 수서 양제본기 대업3년(607년) 8월 을유일 기록을 보면,

『황상(수양제)이 고려 사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돌아가 너의 왕에게 말하라(上謂高麗使者曰:「歸語爾王)」』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수양제가 고려(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에 개황18년(598년)에 제멋대로 왕위까지 삭탈한 것이라면 그 후에 수양제가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말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수양제가 고구려 사신에게,“돌아가 너희 왕에게 말하라”(上謂高麗使者曰:「歸語爾王」)라고 말함으로써 수양제가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불렀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것으로써 수나라가 수문제 때 고구려 왕의 왕위를 제멋대로 삭탈한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는 수나라가 고구려 왕의 왕위를 자기들이 주거나 빼앗거나, 그러한 권리도 권한도 없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왕위는 고구려의 왕위 계승법도에 따라 고구려에서 결정한 것이라는 것을 간접 증명하고 있으며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의 종속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수서 고려전 개황18년의 기록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없앴다(下詔黜其爵位)」이후부터,

고구려 임금의 이름만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문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보통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수나라 군주가 말을 하면서 고구려 임금을 지칭할 때 나온다.

그 이외의 평문에 고구려 임금을 기록할 때 왕위를 생략하고 그 이름을 쓴다.

(보통 고구려 백제 신라 뿐만 아니라 자기나라 이외의 군주를 기록할 때는 그런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있음)

 

그래서 고구려 임금의 이름만 나오는 것이지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삭탈했기 때문에 이름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평문에서는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생략하고 이름만 쓰고

수나라 군주가 말을 하는 대화문에서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부른 예는

멀리 갈 것도 없이 개황18년(598년) 기록 위에 있는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기록에 있다.

 

그것을 보면, 『(황)상(수문제)이 탕에게 옥새를 찍은 문서를 주며 말했다.』라고 시작되어 있어

평문에서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생략하고 이름만을 쓰고 있음을 볼수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짐이 천명을 받아 사랑으로 기르고 강토를 거느리며, 왕에게 바다 한구석을 맡겨」라고 말함으로써

수나라 군주가 말하는 문장에서는 고구려 임금의 직위인 왕을 밝히고 있음을 볼수 있다.

 

따라서, 수서 고려전 개황18년의 기록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없앴다(下詔黜其爵位)」이후부터,

고구려 임금의 이름만 나오는 까닭은 그 문장이 평문이기 때문이지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삭탈했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부터, 평문에서는 왕위를 생략하고 이름만을 쓴 것이고

말을 하는 문장(대화문)에서는 어쩔수 없이 말한 그대로를 쓰다보니 직위인 왕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번역한「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는

매우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오히려 그것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잘못된 번역이라기보다

그러한 번역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정권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국사학계가 아직도 얼마나 식민사관에 빠져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점은 고구려가 자주 독립국가인가 수나라의 하위국가인가(조공책봉 체제하에 있는 국가인가)의 논점이다.

 

식민사관의 개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 체제하에 있는 국가(심지어는 정권) 라고 찍어 누른다.

하지만 잘보면 그것은 거짓과 사기이고, 사실은 고구려가 자주 독립국가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애초부터 고구려 영양왕이 수문제에게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도 없었고,

따라서 수문제가 영양왕을 왕으로 책봉한 사실이 없었던 것이다.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元奉表謝恩,并賀祥瑞,因請封王。高祖優冊元為王)」는 문장은

8주국 12대장군 문건과 마찬가지로 맨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있지도 않은 문장을 나중에 누군가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막바로 말해서 당태종이 거짓말을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가필(加筆)로 판단된다는 말이다.

 

원래 있었던 문장은

「아들 원(元)이 이어서 즉위하니, 고조는 사신으로 하여금 원에게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하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며 옷 한벌을 주었다.(子元嗣立。高祖使使拜元為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賜衣一襲」만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 하에 있지 않았음은 그 다음 문장인

「이듬해인 개황18년(598년)에 원(영양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다는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

수나라의 조공책봉 하에 있어서 수나라에게 눌려 지냈다면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를 침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597년에 고구려에서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여 수나라에게 왕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고

거기에 대해서 수나라가 왕으로 책봉해 주는 원활한 관계라면

598년 1~2월에 갑자기 고구려가 수나라를 칠 이유가 없다.

 

국가간에 관계가 나쁘므로 전쟁을 하는 것이지 두 나라 사이가 원활한데 무슨 공격을 하는가?

공격을 하는데는 원인이 있는 것이고, 그 원인이란 두나라 간의 좋지않은 관계가 그 원인인 것이고

급박하지도 않은데 먼저 공격하는 것은 상대방을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가 수나라를 먼저 공격한 것은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더구나 고구려가 수나라를 만만하게 보았다는 증거이다.

고구려가 만만하게 보는 수나라가 어떻게 고구려의 왕을 책봉해 주는 힘쎈 상국(上國) 될 수 있는가?

 

따라서 597년에 수나라가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은 거짓이며 가필(加筆)된 것이다.

 

오히려 수문제가 영양왕(원)에게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하였기 때문에

개황18년(598년) 1~2월에 원(영양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에는,자기(영양왕)의 아버지인 고려왕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는데 자기에게는

그보다 못한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하였기 때문이다.

 

수서 백관지에 의하면 대장군은 정3품이고, 상개부 의동삼사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종3품이다.

자기에게 아버지보다 높은 품계를 주지는 못할 망정 더 낮은 품계를 주어 자기를 모욕했기 때문에 수나라를 침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논리적으로 보아

왕을 봉해달라고 청하고 그래서 왕으로 책봉해주는 사이좋은 관계였는데 수나라를 먼저 침공했다는 말이 맞는가? 아니면 영양왕에게 그의 아버지 보다 낮은 품계를 주어 영양왕이 모욕을 느껴 수나라를 침공했다는 말이 맞는가?

아무래도 후자가 논리적 타당성도 있고 정황상으로도 맞는 말일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보아도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元奉表謝恩,并賀祥瑞,因請封王。高祖優冊元為王)」는 문장은 가필된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살펴봐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결론은 같다.

즉, 고구려는 수나라의 하위국가나 종속국가가 아님은 명명백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