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58(수나라때-16, 수서 본기4 분석-② 끝.)

상 상 2013. 9. 27. 17:24

 

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 분석

5. 수서 고려전 분석

6. 자치통감(수기2, 5,6 등)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4. 수서 본기분석

 

1) 수서 본기1: (581년부터 611년까지) 분석

2) 수서 본기2: (612년 정월) 분석

3) 수서 본기3: (612년 3월부터 614년 2월까지) 분석

4) 수서 본기4: (614년 3월부터 수나라 멸망까지) 분석

 

 

4) 수서 본기4 분석-②

< 제3차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614년- >

 

그동안에도 수나라 각지에서는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서

4월에는 팽성에서 수만명이 반란을 일으켜 도적이 되고,

5월에는 낭사군을 함락하는 도둑들이, 연안(延安)에서도 반란을 일으키고,왕을 칭하는 자가 나타난다

6월에도 도둑의 무리 3만이,건안군을 함락시키고 태수를 죽인다.

 

이러한 상태에서

7월 계축일(17일)에 수양제가 그 다음으로 회원진에 행차했었다.

그런데 같은 달 갑자일(28일) 고구려가 항복을 청하고,곡사정을 가두어 보낸다.

이것을 구실로 8월 기사일(4일),수양제는 군사를 되돌린다.

 

여기서 생각해 보면

지금 공포에 질려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쓰레기 군대를 보고 항복을 청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수양제가 612년 1차 고구려를 침략하였을때 을지문덕 장군은 두 번 항복하였다.

첫 번째는 압록강을 건너가 수나라 진영으로 직접가서 항복을 했고,

두 번째는 수나라 군대가 평양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오자 사신을 보내 항복하였다.

 

물론 두 번 다 거짓 항복이었고 사실은 적정을 정탐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고 자치통감은 전하고 있다.

또한 항복을 그럴듯하게 보여주기 위해 하루 일곱 번 싸워 일곱 번을 져 주었고

그래서 수나라 군대를 평양에서 30리까지 끌어들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항복을 할때는 왕을 모시고 직접 수양제에게 찾아가 항복하겠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따라 수나라 군대가 후퇴하자 그때부터 폭풍같은 고구려 군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살수에서 30만 대군을 괴멸시켜 살아돌아간 자가 2천7백 명뿐이었다.

 

따라서 항복을 청했다는 것은 또다시 적정을 정탐한 것이며 또다시 더 이상 침략해 들어오면

비참한 패배를 맛볼 것이라는 무언의 경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항복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하여 곡사정을 보내 주었다.

 

이에따라 수양제는 군대를 되돌린다.

더 이상 갔다가는 뼈도 못추릴 비참한 패배를 당하느니 거짓 항복이라도 받고 살아서 무사히 돌아가는 게

낫다고 판단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군사를 되돌릴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엄청난 군비를 들여 그 먼 거리를 꾸역꾸역 왔는가?

무엇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수습도 못하면서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였는가?

 

잔뜩 공포에 질린 수양제의 모습이 상상된다.

더 이상 공격할 능력이 없어져 잔뜩 주눅이 들린 수양제의 모습이 떠 오른다.

 

거짓 항복의 말 한마디에 휴~하고 한숨을 내쉬며 6일만에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 간다.

 

되돌아 갈때의 행군 속도를 보자.

 

8월 기사일(4일) 군사를 되돌려서 10월 정묘일(3일) 동도(낙양)에 도착한다.

59일 만에 요하 부근에서 낙양까지 행군한 것이다.

요하에서 탁군(북경)까지가 도상 직선거리로 약 530km, 탁군(북경)에서 동도까지가 직선거리로 약 681km이니

요하에서 동도(낙양)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약 1211km 이다.

이것의 실제 보행거리는 1211km× 1.472(거리왜곡률) 약 1783km이며,

수나라의 리(里)수로 계산하면 1783km/ 423.9m, 약4200 리(里)이다.

 

요하에서 동도(낙양)까지 약 1783km, 4200 리(里) 중에서

자기나라 안에 있는 탁군(북경)에서 동도까지 직선거리로 약 681km는 자기나라 안에서의 행군 속도로 갔음에 틀림없다.

 

자기 나라 안인 동도(낙양)에 수양제가 도착한 것이 10월 정묘일(3일)이고 서울인 장안에 도착한 것이 그달 기축일(25일)이다.

 

이것의 행군 속도를 계산해 보면,

낙양에서 장안까지 직선거리는 326km이고, 실제 보행거리는 326km× 1.472는 약 479km,

리(里) 수로는 479km/ 423.9m, 약 1130리를 22일만에 갔으므로 이동속도는 1130리/22일, 약51.36리/일 이다.

 

그렇다면 탁군(북경)에서 동도(낙양)까지는 얼마동안 걸렸을까

 

그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681km이고 실제 보행거리는 681km× 1.472(거리왜곡률)은 약 1002km이며,

수나라의 리(里)수로 계산하면 1002km/ 423.9m는 약2363 리(里)이다.

 

이 거리를 낙양에서 장안까지의 행군 속도로 계산하면 2363 리(里)/51.36 리/일= 46일, 46일 걸리고,

간단하게 계산해서 직선거리 326km를 22일 동안 이동하였으므로 681km는 아무리 짧아도 44일이고

정상적으로는 45일은 걸렸을 것이다.

 

요수와 탁군(북경)까지의 도상 직선거리가 약 530km이고 실제 보행거리는 여기에 1.472를 곱하면

약 780km가 나온다. 780km를 수나라 당시의 리(里)수로 환산하면 780km/423.9m= 약1840리이다.

 

이 거리를, 총 소요일수(59일)에서 탁군(북경)에서 동도(낙양)까지 걸린 예상일수(44일로 추정)를 뺀 15일만에 갔다면

「1840리/15일= 122.67리/일」이다. 즉, 하루에 약 123리(里)를 간 것이고

13일만에 갔다면 「1840리/13일= 141.53리/일」이 되어 하루에 약 141리(里)를 간 것이다.

 

이러한 행군 속도는 갈때의 행군 속도, 하루에 약 10여리(里)에 비하면 약 10배 빠른 것이고

옛 중국 군대의 하루 평균 행군 속도 30리보다도 최소 4배에서 약 5배 빨리 간 것이다.

 

이러한 행군 속도는 돌아갈 때 얼마나 빨리 갔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그것은 고구려가 공격해 오면 또다시 몰살 당할까봐“걸음아 날 살려라”는 식으로 마구 도망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군 속도는 고구려가 항복한 것이 아님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11월 고구려에 대한 분풀이를 곡사정에게 가하고 있다.

그 달에 또다시 장평군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흉노족이 거병해 반란을 일으키며,자칭 천자라고 하니,

토벌하였으나,이길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다른 쪽에서 무리 수만(數萬)이 임려산에서 난리를 이으킨다.

산지사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난리를 일으켜도 수습을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고구려에게 워낙 엄청난 패배를 당하여 국력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12월에 수양제가 동도(낙양)으로 다시 갔으나 각지에서 반란은 계속되고 있다.

 

615년에 들어서니

2월에 수나라 북쪽 변경이 수습 불가능한 상태로 간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노선인 북평, 상곡에서 반란을 일어나 나라를 세우고

북으로 돌궐과 연합하고 남으로 옛 조나라 지방을 침구한다.

 

5월에는 역시 북쪽 지방인 서하군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수양제는 태원으로 간다.

7월에는 회남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8월에는 수양제가 북쪽변경을 순시하는데 돌궐이 수양제를 습격하려고 한다.

돌궐은 607년 계민 가한이 직접 수양제에게 와서 복종의 의식을 가졌던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수양제를 죽이겠다고 습격하려는 것이다. 이게 다 고구려에게 대패해서 생긴 일이다.

 

불과 8년 전에는 돌궐의 임금이 수양제에게 무릎을 꿇고 만수무강의 술잔을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수습 불가능한 패배를 당하고 나니 항복했던 놈도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수양제가 안문으로 도망가니 돌궐이 쫓아가 포위한다.

수양제가 매우 두려워하여 정예병으로 뚫고 나가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그것은 위험하다고 말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여러 군(郡)에게 구원병을 부른다. 이래서 돌궐이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때가 9월 갑진일(24일) 이다. 그리고 동도(낙양)에 도착한 날이 10월 임술일(3일)이다.

그러니까 9일만에 안문에서 동도(낙양)까지 직선거리 486km를 달아난 것이다.

그것의 실제 보행거리는 486km× 1.472(거리왜곡률), 715km로 수나라 리(里)수로는 715km/423.9m, 약 1687리 이다.

그러면 하루에 얼마나 도망을 쳤는가? 1687리/9일, 하루에 187리를 도망친 것이다.

 

이러한 속도는 고구려에 패해서 하루에 460리의 속도로 4일 밤낮으로 도망친 것에 비하면 늦은 것이지만

군대의 행군속도 하루에 30리에 비하면 6배 빨리 도망친 것이다.

 

돌궐 군대에게 포위당하여 죽을뻔 하여서 도망친 속도가 이 정도라면(하루에 187리) 

고구려 군에 패하여 도망친 일이 얼마나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하루에 460리)

적어도 돌궐에게 포위당해 죽을뻔한 공포보다 약 두배 반의 엄청난 공포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양제가 동도(낙양)에 돌아와도 사태는 절망적이다.

팽성에서,진(陳)과 여(汝) 사이에서, 동해에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11월에는 고양군에서 12월에는 강군(絳郡)의 도적을 토벌했으나 오래도록 이길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초군(譙郡)에서는 초나라 황제를 칭하니, 한남(漢南)의 여러 군(郡)이 대다수 함락되는 사태에 이른다.

 

616년에 들어서니 사태가 계속 절망 상태로 빠진다.

이러한 상태는 617년에도 계속되더니 618년 3월 드디어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이 수양제를 죽인다.

우문술은 살수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아 도망친 패장, 바로 그 사람이다.

 

이로써 수양제는 50살의 파란만장한 삶을 매듭짓는다.

그로써 수나라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게 다 고구려에게 대패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