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55(수나라때-13, 수서 본기3 분석①)

상 상 2013. 9. 16. 17:26

 

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 분석

5. 수서 고려전 분석

6. 자치통감(수기2, 5,6 등)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4. 수서 본기분석

 

1) 수서 본기1: (581년부터 611년까지) 분석

2) 수서 본기2: (612년 정월) 분석

3) 수서 본기3: (612년 3월부터 614년 2월까지) 분석

4) 수서 본기4: (614년 3월부터 수나라 멸망까지) 분석

 

3) 수서 본기3 분석①

 

< 제1차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612년 >

 

612년 3월 갑오일(15일),수나라 군대가 요수 다리에 도착한다. 이것이 제1차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이다.

수나라 대군이 탁군에 집결한 때가 612년 1월 신사일(1일)인데,  

전투병이 113만 3천 800명이었고, 군량 수송병은 226만 이상, 총 약340만 이었다.

 

1월 계미일(3일)에 수나라 군대가 탁군(지금의 북경)을 출발하였고 3월 갑오일(15일)에 요수에 다달았으니

탁군(북경)에서 요수까지 71일이 걸렸다.

 

이때의 행군속도를 알아보자.

 

탁군(북경)에서 요수까지 직선거리가 갈석을 거쳐가므로 약 530km 정도가 된다.

이것은 당시 몇리나 되나?

 

중국 고대 도량형표에 의하면

중국에서 1리(里)는 1,800척(尺)인데 수나라 때 대업의 연호를 쓸때 즉, 수양제 때 1척(尺)은 오늘날 23.55cm 라고 하므로

1리(里)는 1,800× 23.55=42,390cm 즉, 423.9m 이다.

 

530km를 리수로 환산하면 530km/423.9m, 약 1250 리이다.

옛날 중국에서 군대는 하루에 30리를 행군하였으므로 1250리/30 약 42일의 행군 거리이다.

그런데 71일이 걸렸다. 왜 42일 걸릴 거리를 71일이나 걸렸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 군대가 너무 많아서 일 것이다.

전투병이 113만 3천 800명이었고, 군량 수송병은 226만 이상, 총 340만이 출발하는데만

40일 걸렸다고 하니 처음 출발한 군대는 요수에 가까이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출발한 군대가 요수에 도착한 것이 첫부대 출발후 71일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수나라가 요수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당해 늦어졌을 것이다.

고구려군의 뚫고, 또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전진했기 때문에 많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셋째, 1250리 라는 것은 직선거리이지 실행거리, 즉 실제 가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가는 거리는 산이 막혀 있으면 돌아가야 하고 강이 있으면 나루터로 돌아가야 해서

실제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고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하다.

따라서 실제거리는 지도상의 직선거리보다 상당히 멀다.

 

예를 들어서, 서울과 부산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324km이다.(지도상의 직선거리)

그러나 실제로 가는 거리는

도로원표에 의하면 477km이고(일반도로),

고속버스 운행정보에 의하면 서울-부산 총 주행거리는 431.5km,

기차길의 경우 서울역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444.3km이다.

 

이중에서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일반 도로이므로 477km가 실제거리에 제일 가깝다.

그러면 도상 직선거리와 보행 실제거리의 비율은 477km/324km=1.472(거리왜곡률)이므로

실제 보행거리는 도상 직선거리에 1.472를 곱하면 될 것이다.

 

탁군(북경)과 요수까지의 도상 직선거리는 갈석산을 거쳐 약 530km이고 여기에 1.472를 곱하면 약 780km가 나온다.

780km를 수나라 당시의 리(里)수로 환산하면 780km/423.9m, 약1840리이다.

1840리는 하루에 30리씩 행군하므로 1840리/30리 = 61.33일 약 62일 걸릴 거리이다.

그런데 71일이 걸렸으므로 약 9일의 오차가 났다.

 

하루 평균 행군속도를 보면 1840리/71일이므로 하루에 약 26리를 간 것이다.(수양제 군대의 고구려 침략 행군속도)

실제거리를 감안해도 9일 늦게 도착한 것이며, 그 당시 군대행군 속도보다도 늦게 움직인 것이다.

 

왜 그럴까?

 

넷째, 수나라 군대들이 고구려에게 겁을 먹고 천천히 행군했을 것이다.

수나라는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전, 수문제때 30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를 10에 8~9를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 일이 있었다.

따라서 수나라 군대는‘고구려로 가면 10에 8~9이 죽는다’라는 공포가 있었고 그 때문에 행군이 늦어져

9일간이나 늦게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수양제가 요수를 건넌 때가 3월 갑오일이라고 하는데 같은 달 그전 기사에 갑오일이 있으므로 갑오일이 아니라 갑자일이라고 한다. 즉, 3월 25일 날 수양제가 요수를 건넜다. 그리고 수나라 병사들이 요동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4월이 지나 5월이 지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6월이 되어도 고구려군이 꿈쩍 안하자 수양제는 수하 장군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7월 임인일(24일) 그동안 평양으로 갔던 별동대 30만 대군이 무너져 몰살당하여 도망해 오자

그달 계묘일(25일) 수양제는 군대를 되돌려 도망친다.

 

9월 경진일(자치통감에 의하면 경인일이고 날짜로는 13일이다) 수양제가 낙양에 도착하고 있다.

그러면 요수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요수에서 탁군(북경)까지 직선거리가 갈석산을 거쳐 가므로 약 530km,

탁군(북경)에서 동도(낙양)까지 직선거리가 약681km로 요수에서 동도까지 직선거리로만 1,250km 정도가 된다.

이 1,211km의 실제 보행거리는 거리왜곡률 1.472을 곱하면 될 것이다.

즉 실제 보행거리는 1,211km× 1.472= 1783km이다.

이것을 수나라 때 리(里)수로 계산하면 1리(里)가 423.9m였으므로 1783km / 423.9m 는 약 4200리(里)이다.

 

이 거리를 7월 25일 요수에서 후퇴를 시작하여 9월 13일에 낙양에 도착하였으니 48일 만에 4천200리를 도망친 것이다.

 

이중에서 수나라의 영토안에 있는 탁군(북경)에서 동도(낙양)까지는 그 당시 자기나라 안에서 이동하는 속도로 갔을 것이다.

수양제의 당시 자기나라 안에서의 이동속도를 보자.

 

수서 양제본기 대업 10년(614년) 겨울 10월 기록을 보면

「정묘일(3일),(황)상이 동도(낙양)에 도착하고 기축일(25일),(황상이) 서울(장안)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동도(낙양)에서 장안까지 22일 동안에 이동한 것이다.(날짜는 자치통감 번역본에서 가져온 것임)

 

낙양에서 장안까지 직선거리는 326km이고, 실제 보행거리는 326km× 1.472는 약 479km,

리(里) 수로는 479km/ 423.9m, 약 1130리이므로 이동속도는 1130리/22일, 약51.36리/일 이다.

 

그렇다면 탁군(북경)에서 동도(낙양)까지는 얼마동안 걸렸을까

 

그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681km이고 실제 보행거리는 681km× 1.472(거리왜곡률)은 약 1002km이며,

수나라의 리(里)수로 계산하면 1002km/ 423.9m는 약2363 리(里)이다.

 

간단하게 계산해서 직선거리 326km를 22일 동안 이동하였으므로 681km는 아무리 짧아도 44일이고

정상적으로는 45일은 걸렸을 것이다.

 

탁군(북경)에서 동도(낙양)까지의 행군 속도를 계산해 보면 2363리/45일, 즉52.51리/일 이다.

 

동도(낙양)에서 장안까지의 행군 속도나 탁군에서 동도(낙양)까지의 행군 속도나 비슷하다.

역시 자기내 영토 안이므로 행군 속도가 비슷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렇다면 요수에서 탁군(북경)까지는 3~4일만에 도망쳤다는 말이다.

탁군(북경)과 요수까지의 도상 직선거리가 약 530km이고 실제 보행거리는 여기에 1.472를 곱하면 약 780km가 나온다.

780km를 수나라 당시의 리(里)수로 환산하면 780km/423.9m= 약1840리이다.

 

이러한 거리를 3일만에 도망쳤다면 실제 보행거리 780km/3일, 하루에 260km를 도망친 것이고

1840리/3일, 하루에 약 613리를 도망친 것이다.

 

4일만에 도망쳤다면 780km/4일로서, 하루에 195km를 달아났다는 것이며 1840리/4일로 하루에 460리의 속도로 도망친 것이다.

 

4일만에 도망쳤다고 해도

옛날 중국군대의 정상 행군속도가 하루에 30리임을 감안하면 15배에서 16배정도 빨리 도망친 것이니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알만할 것이다.

 

이러한 속도는 살수대첩에서 대패한 후「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하였다(자치통감)」는

속도와 비교하면 비슷하게 도망친 것이다.

 

여기서 자치통감의 수나라 군사들이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450리를 도망쳤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 할수 있고,

수양제가 4일동안 잠도 못자고 밤낮없이 하루에 460리씩 총 1840리를 도망쳤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와 정신없이, 다리가 부러지게 도망쳤던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어서

자치통감 수기7 양제 대업 12년(616년) 여름 4월 정사일(1일) 기사를 보면

「수양제는 (대업) 8년(612년 즉, 고구려에게 대패한 해) 이후부터 매일 밤에 잠을 자다가 항상 놀라서 두근거리며 “적이야”라고 말하여 몇 명의 부인으로 하여금 흔들고 쓰다듬도록 하고서야 마침내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하니

이때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수양제에게 얼마마한 공포를 주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인 1천리 길을 30일동안 맨몸으로 걸어가도 발에 물집이 생기고 여기저기 몸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걷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런데 4300리 길을 48일 만에 도망쳤으니 아마 도착한 병사들은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놀랬으면 4300리 길을 도망쳤겠는가?

얼마나 공포가 몰려 왔으면 4300리 길을 48일 만에 도망쳤겠는가?

몇백만 대군이 얼마나 공포에 떨면서 허겁지겁 도망쳤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340만 대군이 완전히 괴멸적 타격을 받아 패주한 것이다.

전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을 고구려가 거두었다.

이것이 우리민족이고, 우리의 조상이다!

전세계 어느 누가 이러한 대승을 거두어 보았는가?

전세계 어느 놈이 감히 우리민족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가!

 

이러한 참패를 당하니 수나라는 11월 기묘일,종친의 딸 여화용 공주를 고창왕에게 시집보낸다.

돌궐의 가한(황제)을 굴복시키고, 토욕혼을 정복하여 4군을 설치한 당당한 때에는 있을 수 없는,

힘이 없어 공주를 다른 나라 왕의 처로 시집보내야만 하는 처량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 고구려에게 괴멸적 참패를 당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