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60(수나라때, 수서 고려전 분석-2)

상 상 2013. 10. 2. 17:08

 

차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분석

5. 수서 고려전분석

6. 자치통감 수기(隋紀)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5. 수서 고려전 분석-2

 

1) 수문제 때의 기사

(1) 개황 초 기사

(2) 개황 17년(597년) 기사

(3) 개황18년 기사

 

2) 수양제 때의 기사

(1) 대업 7년(611년) 기사

(2) 대업 9년(613년) 기사

(3) 대업 10년(614년) 기사

 

 

2) 수양제 때의 기사

 

(1) 대업 7년(611년) 기사 <수양제의 제1차 침략>

 

대업 7년(611년) (황)제(帝)가 장차 원의 죄 토벌하려고, 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너, (황)상이 요동성에 군영을 설치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각기 병사를 그 성 아래로 정돈하였다. 고려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막았으나, 전투가 다수 불리하자, 모두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帝)는 제군에 명하여 성을 공격케 하였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로,“고려가 만약 항복을 하면 바로 받아들이고, 군사를 풀어서는 않된다.”고 명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때, 적이 번번이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뜻에 따라 감히 기회를 이용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황제에게) 달려가서 아뢰도록 명령하였다. 회보가 도착할 무렵이면 적들이 수비를 역시 정비하고 적절히 나와서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 번을 되풀이하였으나 양제는 깨닫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량은 다하고 군사는 지친 데다, 군량 수송마저 이어지지 않아 모든 군대가 패전하니, 결국 후퇴하였다.

 

⇒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모든 군대가 패전」해서 후퇴했다는 대목이다.

수양제는 정예군 30만이 살수에서 대패하였기 때문에 후퇴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군대가 패전」했기 때문에

후퇴하였다는 것이다. 즉 살수에서 30만이 패전한 것과 아울러 나머지 310만 모든 군대도 패전했기 때문에

후퇴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양제가 요수에서 탁군(북경)까지 1840리를 하루에 450리씩 밤낮없이 4일동안 도망쳤던 것이다.

 

참고로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이 수서 본기에는 대업8년(612년)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 수서 고려전에는 대업7년(611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수양제가 장안을 떠난 때가 대업7년(611년)이기 때문이다.

탁군(북경)에 집결한 때가 대업8년(612년)이다.

 

또한, 여기에 살수의 패전 기록을 없는 것을 보면 수서 고려전도 자기들에게 불리한 사실은 감추어 빼버리는 춘추사관에 입각하여

쓴 것임을 알수 있다.

다시말해서 수서 고려전도 사실을 사실대로 쓴 것이 아닌, 믿을 만한 사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대업9년(613년) 기사

 

(대업)9년(613년)에 양제가 다시 친정(親征)하였다. 이때는 칙서로 모든 군대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때마침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반서가 도착하자, 양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육군(六軍) 모두를 이끌고 돌아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도망하여 고려로 들어가니, 고려가 사실을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해 추격을 해와 뒤에 따르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 여기서 잘 봐야 할 대목이 『곡사정이 도망하여 고려로 들어가니, 고려가 사실을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해 추격을 해와 뒤에 따르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자치통감에는 『고려가 따라와 치니, 맨뒤에 있던 허약한 수천명이 죽고 약탈 당하였다』<수기6 양제 대업9년(613년)>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자치통감이 얼마나 헛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가를 여실히 알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치통감도 춘추사관에 의해 조작된 사서임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중국사서가 그렇듯이 춘추사관에 얼룩진, 사실을 왜곡한 문건이 자치통감이며

따라서 자치통감 역시 믿을 것이 못된다는 사실이다.

 

(3) 대업 10년(614년) 기사

 

(대업)10년(614년)에 또 다시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때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사람들 대다수가 고향을 버리고 떠돌았으며,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어, 군사가 대다수 기한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황제가)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피폐되어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곡사정을 가두어 보내 속죄하였다. 황제가 허락하고 회원진에 주둔하여 항복 문서를 받았다. 이에 포로와 군대의 무기 및 양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려의 사자로 하여금 친히 태묘에 고하도록 한 뒤 억류시켰다. 이어서 원을 불러 들여 입조토록 하였으나, 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양제는 제군(諸軍)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후에 거사할 것을 꾀하였으나, 마침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결국 다시 실행할 수 없었다.

 

⇒여기를 보면 무슨 (고구려의) 항복문서를 받았느니 하고 있지만

수서 본기를 보면 이때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로 올때 하루에 13리씩을 행군했으나 되돌아 갈때는 하루에 123리(里)에서 141리씩

행군하였다. 올 때와 갈 때의 행군 속도가 10배 차이난다.

고구려에 다가갈때는 엄청난 죽음의 공포 때문에 기어가다 시피한 군대가 항복을 받았다는 얘기는 무엇이며

고구려에서 벗어날 때는‘다리야 날 살려라!’는 식으로 마구 도망간 군대가 항복 문서를 받았다는 황당한 얘기는 무엇인가?

 

저번 수서 본기 분석에도 설명했듯이

고구려가 항복을 청했다는 것은 또다시 적정을 정탐한 것이며 또다시 더 이상 침략해 들어오면 비참한 패배를 맛볼 것이라는

무언의 경고를 한 것이다. 물론 항복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하여 곡사정을 보내 주었다.

 

이에따라 수양제는 겁을 먹고서 ‘다리야 날 살려라!’는 식으로 마구 도망간 것이었다

 

그런 것을 마치 수나라가 승리한 것처럼 쓴 것은 한마디로 자화자찬식 춘추필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형편없는 군대가 고구려 임금을 부르니 고구려 임금이 올 리가 있겠는가?

고구려 임금이 끝내 오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항복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수나라 군대의 승전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양제는 제군(諸軍)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후에 거사할 것을 꾀하였으나」는 것도 거짓말이다.

이때는 물론 이 이전에도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다시 후에 거사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무슨 또다시 거사할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다시 후에 거사할 것을 꾀하였으나」이렇게 써놓았으니

중국인들의 춘추필법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거짓말인지 알만 할 것이다.

 

그리고 수나라의 패전으로 수나라는 끝내 후에 거사는 고사하고 계속된 천하대란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는 고구려는 승전국, 수나라는 패전국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