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

천비 묘지명(泉毖墓誌銘)

상 상 2011. 10. 9. 12:39

천비는 바로 전에 올렸던 헌성(천헌성)의 손자이다.

헌성의 묘지명에 「자식으로 현은(玄隱), 현일(玄逸), 현정(玄靜)이 있다」는 글귀가 있었는데 천은이 바로 천비의 아버지이다.

즉, 연개소문(고조)→ 천남생(증조)→ 천헌성(조)→ 천은(부)→ 천비로 이어지고 있다.

 

그 증거는 본문 묘지명에 나오는

『증조는 특진 변국양공(特進 卞國襄公) 남생이며,

조(祖)는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변국장공(卞國㽵公) 헌성이며,

부(父)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 변국공(卞國公) 은(隱)이다.』라는 글귀이다.

 

그리고 찬자(撰者)를 보면 역시 「변국공(卞國公) 은(隱)이 찬(撰)하다.」라는 글귀로 아버지가 직접 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씨가 천씨로 바뀐 것은 중국인들이 한 짓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글귀는

 

1) 천남생 일가가 대대로 습봉하고 있는 「변국공(卞國公)」이다.

단재선생에 의하면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番朝鮮)의 옛 땅」이라고 해서

변한(弁韓)의 옛 영토가 요하 이서(以西)임을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이 천남생 일가의 묘지명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삼한이 본래는 요하 이서에 변한이 있었고,

요하 이동 요동반도와 길림쪽에는 진한이 있었고,

압록강 이남에는 마한이 있었다 는 단재선생의 말씀이 역사적 사실임이 밝혀진 것이다

 

남생이 본국인 고구려를 배반하고 상대적으로 서쪽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삼한 중에서 서쪽에 있었던 변한의 왕이라는 의미에서 변국공(卞國公)의 벼슬을 준 것이다.

(변한弁韓을 변한卞韓이라고도 썼다. 그 증거는 삼국사기 신라 박혁거세 본기 19년조를 보면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원문]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변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 후삼한, 남삼한이며, 북쪽에 있었던 전삼한이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설립한 삼한이다.)

 

2)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조선왕(朝鮮王) 고장(高藏)의 외손」이라는 말도 눈여겨 봐야 할 사항이다.

고장(高藏)은 바로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을 말하고 있으며 천비가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말은

고구려 왕가와 연개소문 가문이 당나라에 가서 혼인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나라는 망해서 먼 타국으로 갔으면서도 같은 민족끼리 혼인하여 민족의 뿌리를 잇고자하는 조상의 노력을 볼수 있다.

 

3) 천비를 경조만년향인(京兆萬年鄕人)이라고 천비의 아버지가 지칭한 것도

자식들은 당나라 수도에서 전란없이 평안하게 살아라하는 아버지의 애뜻한 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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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비묘지명(泉毖墓誌銘)

해석자 : 박한제

 

당(唐) 고(故) 선덕군(宣德郡) 효기위(驍騎尉) 치천현(淄川縣) 개국자(開國子) 천군(泉君)의 지(誌) 및 명(銘)

부(父) 광록대부(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은(隱)이 찬(撰)하다.

 

대저 온(溫), 양(良), 공(恭), 검(儉)은 사람의 근본이다. 시(詩), 서(書), 전(傳), 역(易)은 가르침의 으뜸이다.

사람이 백행(百行)의 아름다운 덕을 갖추고, 양의(兩儀)로부터 타고난 바른 성질을 받았으며,

평화로운 기(氣)를 토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며, 예(禮)의 경전(經典)을 지키고 있어서 인의(仁義)를 체득함으로써 몸을 세우고,

충성과 곧음을 쌓아 스스로를 행하면 창졸간이라도 법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반드시 근엄하고 장중하게 될 것이니[必蹈於矜㽵]

(이것은) 무릇 고인들이 어렵게 여겼던 바이니 다만 오늘날이라고 쉬운 바는 아니다. (이것들을) 아울러서 가진 자 여기에 있음이라!

 

이름은 비(毖)요, 자는 맹견(孟堅)이니 경조(京兆) 만년(향)인(萬年鄕人)이다.

증조는 특진 변국양공(特進 卞國襄公) 남생이며,

조(祖)는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변국?공(卞國㽵公) 헌성이며,

부(父)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 변국공(卞國公) 은(隱)이다.

 

모두 대를 잇고, 가(家)를 이어 문장이 번성하고 복이 겹쳐졌다.

더욱 자(子 : 毖)는 조상의 덕이 그에 미쳐[剋茂貽厥] 일찍이 명예가 드러났다.

나이 겨우[年甫] 2세에 치천현(淄川縣) 개국남(開國男)으로 봉함을 받고,

이윽고 치천자(淄川子)로 진봉(進封)되었으니 식읍이 400호였다. 또 효기위(驍騎尉)로 제수받고 음(蔭)으로

태묘재랑(太廟齋郞)에 보임되었다. 마침 변방에 일이 있자 선덕군(宣德郡)을 제수받게 되었다. 이윽고 방선(放選:과거)에 뽑혔다.

 

곧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조선왕(朝鮮王) 고장(高藏)의 외손이며 태자첨사(太子詹事) 태원공(太原公)인 왕위(王暐)의

자서(子壻)가 되었다.... 인척이[姻姬] 우수한 태도를 연이었고, 천부(天賦)의 자질을 받았으니 시(詩)와 예(禮)가

정훈(庭訓)에 들리고, 아울러 강학(講學)에 더욱 힘쓰니 명예가 날로 새로워졌다.

육도(六韜)와 옥검(玉鈐)의 병서(兵書)와 둔갑(遁甲)의 서(書)와 풍각(風角:바람을 보아 길흉을 점침),

조정(鳥情:새로서 점침)의 술(術)에 대해서는 유현(幽玄)한 것까지 연마하고, 오묘한 것을 통찰하고,

괴기로운 일에 정통하여 작은 것을 찾아,[探微方將] 천구(天衢)에 올라가서 고양(高驤)하고 태계(太階)에 올라

도(道)를 논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찌 천수[향년]을 알겠는가. 갑자기 오복(五福)의 효능이 일대를 이루지 못했구나.

영령의 구천(九泉)의 슬픔이 갑자기 닥쳤구나. 그리하여 개원(開元) 17년 세차(歲次) 기사(己巳) 9월 4일 경조부(京兆府)

흥안리(興安里) 사제(私第)에서 임종하였으니 춘추(春秋)는 22세였다. 개원 21년 세차 계유 10월 갑오 삭,

16일 기유에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의 인산(印山) 구영(舊塋)에 옮겨 묻었다. 예법에 따른 것이다.

 

분토(墳土)가 높아서 구름 끝에 두 개의 석실을 바라보면, 무성한 잣나무와 고요한 숲이 보이고 삼천(三川 : 河, 洛, 伊水)의

손안같이 내려다 보인다. 장차 바람이 울도(鬱島)를 옮기고, 바다가 상전(桑田)으로 변할까 두려워하여,

곧은 선비의 이름을 삼가 밝힘으로써 등공(藤公)의 실(室)에 표(表)하고자 하노라. 이에 (다음과 같은) 명(銘)을 지었노라.

하늘의 푸르고 푸르름이여 그 색깔은 바르구나. 사람의 한없음이여. 그 능력은 오래구나. 꿈틀거리는 이 만류(萬類)여.

생(生)하면 노(老)하고, 병들면 죽는 저 천수의 깨달음이여. 이제 끝났구나. 기(氣)에서 나서 공(空)으로 돌아가니,

문득 보였다가 갑자기 끝나니 어찌 타고난 운명이 회오리처럼 없어짐을 가지고 조화(造化)의 무궁(無窮)함을 알겠는가.

다시 명(銘)을 지었노라. 양목(梁木:공자)의 그 무너짐(죽음)이여. 태산(太山)의 무너짐이여.

철인(哲人:공자)도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니. 관(棺)의 빗장이 영원히 닫히네.

인산(印山)의 골짜기에 만고천추(萬古千秋)동안. 오호(嗚呼) 애재(哀哉)라!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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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천비묘지명(泉毖墓誌銘)

 

唐故宣德郎驍騎尉淄川縣開國子泉君誌銘」

父光祿大夫衛尉卿上柱國卞國公隱撰文」

夫溫良恭儉人之本也詩書傳易敎之宗也其有摠百行之懿德」

稟兩儀之正性吐納和氣佩服禮經體仁義以立身蘊忠貞而行」

已造次不踰於規矩顚沛必蹈於矜㽵盖古人之所難匪唯今之」

所易兼而有者其在玆乎諱毖字孟堅京兆萬年人也曾祖特進」

卞國襄公男生祖左衛大將軍卞國㽵公獻誠父光祿大夫衛尉」

卿卞國公隱竝繼代承家榮章疊祉惟子剋茂貽厥早着聲芬年」

甫二歲受封淄川縣開國男尋進封淄川子食邑四百戶又授驍」

騎尉以蔭補太廟齋郎屬有事於土授宣德郎尋蒙放選」

卽開府儀同三司朝鮮王高藏之外孫太子詹事太原公王暐之」

子壻豈▨門承鼎乃▨兼▨姻姬嬋聯雅度稟乎天姿詩禮聞於庭」

訓加以護學請益休譽日新韜鈐遁甲之書風角鳥情之術莫不」

硏幽洞奧精蹟探微方將步天衢以高驤登太階而論道何知百」

齡儵忽五福之驗無徵一代英靈九泉之悲俄及粤以開元十七」

年歲次己巳九月四日終於京兆府興寧里之私第春秋二十有」

二以開元廿一年歲次癸酉十月甲午朔十六日己酉遷措於河」

南府洛陽縣之印山舊塋禮也高墳崫望二室於雲端茂栢蕭」

森俯三川於掌內將恐風移鬱島海變桑田式昭貞士之名用表」

藤公之室乃爲銘曰」

天之蒼蒼兮其色正耶人之悠悠兮其能久耶蠢玆萬類兮生老」

病死悟彼百齡兮今也已矣生於氣兮立於空儵而見兮忽而終」

何賦命之飄索知造化之無窮  重曰梁木其壞兮太山其頹」

哲人一去兮不復再來幽扃永閟兮印山之隈萬古千秋兮嗚呼」

哀哉」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박한제 羅振玉 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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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정보 시스템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