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

천남산 묘지명(泉男産墓誌銘)

상 상 2011. 10. 6. 07:33

천남산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셋째 아들이다.

둘째형 남건과 함께 맏형 남생(男生)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여기에서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사항은

 

첫째, 고구려 사람인 천남산을 가리켜 『요동(遼東) 조선인이다.(遼東朝鮮人也)』라고 한 점이다.

      여기서도 고구려 사람을 조선인(고조선인)이라고 했음을 다시한번 확인 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고구려 사람이 조선인(고조선인)임을 다시한번 확인 해 주었다.

 

그 다음 요동에 조선(고조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한반도에 국한된 고조선설은 거짓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두 번째, ‘東明之裔寔爲朝鮮’이다.

      '東明之裔寔爲朝鮮’를 여기서는 ‘동명(東明)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이렇게 해석하고 있는데

     ‘東明之裔’는‘동명의 후예’가 맞으나 ‘寔爲朝鮮’은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寔은 ‘식’으로 읽으며, 뜻은 ‘이’라는 관형사로 쓰이거나 ‘참으로’또는 ‘두다’의 뜻을 가지고 있고,

爲는 ‘위’라고 읽고 뜻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해석자 박한제씨가 해석하듯이‘세웠다’보다는 ‘다스렸다’가 옳은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동명의 후예가 참으로 조선을 다스렸도다.’가 맞는 해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명(東明)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라고 해석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조선(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단군이지 동명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명의 후예가 옛 조선(고조선)인 고구려를 다스렸다’

즉, ‘동명의 후예가 참으로 조선을 다스렸도다.’이렇게 해석해야

 

조선은 고구려를 뜻하고 고구려가 조선(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어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조선은 고구려를 뜻하고 있고 이것은 고구려가 조선(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나온 것임은 틀림없다.

 

어찌되었건 여기서 또한번 고구려가 조선(고조선)을 계승했음을 확인 할수 있고

이것은 남산의 묘지명에서 얻은 또하나의 소득이라고 할수 있다.

 

셋째,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의 이름은 추모(鄒牟)이므로

      추모가 정확한 이름이지만

      중국에서는 주몽(朱蒙)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단재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민족의 이두자를 중국사람들이 몰라서 제멋대로 틀리게 쓴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동명성왕의 이름을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렇게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고기(古記 - 해동고기 같은 사서)에서 전해준 정확한 이름,‘추모(鄒牟)’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서에서 나오는 이름 ‘주몽(朱蒙)’을 먼저 써서

후손인 우리들이 전부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주몽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과

사대주의자 김부식의 잘못으로 우리조상의 이름 하나 똑바로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재선생의 말씀대로 이제부터라도 추모(鄒牟)왕, 또는 추모라고 올바로 불러야 하겠다.

 

한편, 벼슬의 명칭이‘대주(大周)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나가는 것을 보아

남산(男産)은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때 죽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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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해석자: 박한제

 

대주(大周)의 고(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爼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고조(高祖)와 증조(曾祖)는 중리(中裏)의 뛰어난 지위를 이었고 조부와 부친은 대로(對盧)의 큰 이름을 전했으며

군(君)은 태어나기 전부터 현명함을 본받았고[斧囊象賢] 임금에게 책명을 받아 조상의 은덕으로 복이 넘쳤다.[金册餘慶]

태어나면서부터 영민(英敏)하고 은혜로왔고 달이 지나자 남보다 뛰어났으며[勿則過人] 돌이 되자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고구려의 왕이 소형(小兄)의 지위를 내려주었고 나이 18세에 대형(大兄)의 지위를 내려주었으며

13등의 반차(班次)를 재차 추거되어 승진해 2천리의 성지(城池)(를 받아) 성년이 되지 않아 능히 다스렸고,

오졸(烏拙), 사자(使者)와 예속(翳屬), 선인(仙人)에 이르러 비록 국가기구의 권한을 분장(分掌)했으나

진실로 고유(高惟)로써 앞장을 서게 하였다.[旌騎] 나이 21세에 중리대활(中裏大活)을 가(加)하였고

23세에 위두대형(位頭大兄)으로 옮겼고 누차 옮겨 중군주활(中軍主活)이 되었으며,

30세에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되었다. 지역에 따라 관위(官位)를 옮기고 왕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게 되어[寵非王署]

세찬 바람은 깃을 날려(?)[折風捶羽] 영예가 고구려 지역에서 끊어졌고 귀한 지체가 없어져(?)[骨籍施金]

총애가 현도의 지역에서 끊어졌다. 당에 속해 원방(遠方)에 봉해져 한성(漢城)을 지키지 않음에 미쳐 맥궁(貊弓)이

입헌(入獻)되고 호시(楛矢)가 왕에게 바쳐졌다. 군은 총장(摠章) 원년에 우리의 관대(冠帶:官品)에 따라 사재소경(司宰少卿)을

제수받았고 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을 가하였다.

옛날 왕 만(滿)이 연을 그리워하다가 비로소 외신(外臣)의 요(要)를 얻어 마침내 한(漢)과 통함을 이루었으나

겸백(縑帛)의 영예만이 들렸을 뿐이다. 군(君)은 이민족이 사는 구역(藁街)에서 옥(玉)을 울리고 극서(棘暑)에서 금(金)을 차고,

아침에 북궐(北闕)에 나아가 한가히(때때로?) 황제[龍]의 일을 보고[簪筆] 저녁에는 남린(南隣)에 머물면서 황제 곁에서[近[股]]

착잡하게 생황(笙簧)을 타면서 노래했으니 통역의[象胥] 적관(籍貫)으로 당시 이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성력(聖曆) 2년(699)에 상호군(上護軍)을 받았고, 만세(萬歲) 천수(天授) 3년(?)에는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또 영선감대장(營繕監大匠) 원위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으로 옮겨 앉아서 주문(朱門)을 열고(호화로운 집에 살고)

마침내 청토(靑土)에 봉해졌으니, 비단으로 싼 나무창으로[棨戟] 깃발을 달아 벌려 놓고 공신의 집안이 망하지 않을 것을

기약하면서[山河] 우이(嵎夷)에 거처하여 마침내 제복(除服)을 황(荒)하였다.(?)

아아, 잠지(蠶支)가 공적에 보답할 길을 열었는데(?) 번병(蕃屛)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체학(鯷壑)이 비늘을 벗었는데 배를 옮겨타고

갑자기 멀리 가는구나(죽게되었다는 의미인 듯).

나이 63세, 대족(大足) 원년 3월 27일 사택(私宅)에서 병을 만나 죽으니 그 해 4월 23일에 낙양현 평음향(平陰鄕) 모처에 묻었다.

망산(邙山)의 무덤길에 종의(鍾儀)의 한을 길이 묻었으나 요수(遼水)는 무극하여 어찌 장작(莊舃)의 신음을 듣겠으며

고국으로의 길은 멀기만 하니 상여가[輤車] 어느 날이나 (돌아갈꼬)? 학(鶴)이 멀리서부터 날아오니 위엄있던 성곽이 영원히 무너지고

마렵(馬鬣)이 공존(空存)하니 등공(螣公)의 거실은 오랫동안 가렸도다. 비록 황장(黃腸)과 제주(題湊)(를 쓰고) 황제가 사여한

흙으로[天壤] 무궁함을 빌고 현석(玄石)에 훈적(勳績)을 기록하여 능곡(陵谷)이 변하더라도 오히려 알 수 있으니 그 사(詞) 다음과 같다.

넓고 신령스러운 바다여, 백천(百川)이 모이는 곳. 동명(東明)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호(胡)를 위혁하고 맥(貊)을 제압하였으며 서주(徐州)와 통하고 연(燕)을 막았도다. 험준함과 굳음에 의지하여 예부터 옮기지 않았는데

이에 당(에 귀속하게 됨)에 미쳐 동호(東戶)로 화했도다. 용발(溶渤)을 복종하여 인도하고 수호(水滸)를 편안히 따르게 하니

남이(藍夷)가 만나 하나가 되고 계루(桂樓)가 바로잡혀 두루 미치는구나(?).

그만이 굳건하고도 오랫동안 우리 관직을[龜組] 받고 마침내 고가(藁街)에서 영예를 누리게 되었고

아에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도다. 훌륭한 저택에서 살면서 아침을 맞고 황제의 주위에서 아침마다 배알하니

훈공이 상서(象胥)로서 성대하구나. 총애가 황제에 두루하여 이에 청사(靑社)에 봉지를 받았으나 산하(山河)가 안으로 끊어져

요양(遼陽)이 어찌 허락할꼬? 고국을 그리며 마음을 상하니 종의(鍾儀)의 영원한 한(恨)과 장작(莊舃)의 슬픈 신음.

비단으로 싼 나무 창으로 깃발을 달아 벌려 놓고 옥을 차고 금을 허리에 차도 종고(鐘鼓)의 깊은 근심,

추억이 깊은 숲을 넘어가고(?) 머물러 고독함을 노래해도 제수(濟水)와 원수(洹水)가 원망스럽구나.

성명(聲明)이 영원히 끝나도 가성(佳城)은 영구하여 몸을 망산에 맡기니 떠도는 혼은 멀기만 하도다.(?)

유석(幽石)에 명(銘)을 새기니 애통한 전기(傳記가 불후(不朽)하도다.

통직랑 한성형 개국자, 천광부 나이 18세. 장안 2년(702) 4월 23일 낙양현의 경계에 묻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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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판독자: 박한제

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繕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幷序」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而開都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雖星辰海嶽莫繫於要荒而俎豆詩」

書有通於聲敎承家命氏君其後也乃高乃曾繼中裏之顯位惟祖惟禰傳」

對盧之大名君斧囊象賢金冊餘慶生而敏惠勿則過人年始志學本國王」

敎小兄位年十八敎大兄位十三等之班次再擧而昇二千里之城池未冠」

能理至於烏拙使者翳屬仙人雖則分掌機權固以高惟旌騎年廿一加中」

裏大活廿三遷位頭大兄累遷中軍主活卅爲太大莫離支官以地遷寵非」

王署折風羽榮絶句驢之鄕骨籍施金寵殊玄菟之域屬  唐封遠曁」

漢城不守貊弓入獻楛矢來王君以摠章元年襲我冠帶乃授司宰少卿仍」

加金紫光祿大夫員外置同正員昔王滿懷燕載得外臣之要遂成通漢但」

聞縑帛之榮君獨鏘玉於藁街腰金於棘署晨趍北闕閒簪筆於蘷龍夕宿」

南隣雜笙歌於近股象胥之籍時莫先之聖曆二年授上護軍萬歲天授三」

年封遼陽郡開國公又遷營繕監大匠員外置同正員坐闢朱門遂封靑土」

列旌旃於棨戟期帶厲於山河奄宅嵎夷遂荒徐服嗚呼蠶支啓祚蕃屛未」

勤鯷壑摧鱗遷舟遽遠年六十三大足元年三月廿七日遘疾薨于私第以」

其年四月廿三日葬於洛陽縣平陰鄕某所邙山有阡長沒鍾儀之恨遼水」

無極詐聞莊舃之吟故國途遙輤車何日鶴飛自遠令威之城郭永乖馬」

空存滕公之居室長掩雖黃腸題湊與天壤而無窮而玄石紀勲變陵谷而」

猶識其詞曰」

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寔爲朝鮮威胡制貊通徐拒燕憑險負固厥」

古莫遷爰逮有唐化涵東戶賓延渤綏懷水滸藍夷會同桂婁董溥」

惟彼遒長襲我龜組遂榮藁街爰兮棘列甲第朝啓承明旦謁勲懋象胥寵」

均龍卨遽開靑社山河內絶遼陽何許故國傷心鍾儀永恨莊舃悲吟旌旃」

啓戟珮玉腰金鼓鍾憂眩逾憶長林留奏獨思濟洹爲咎聲明長畢佳城永」

久託體邙山遊魂遼勒銘幽石㾥傳不朽」

通直郎寒城縣開國子泉光富年十八長安二年四月廿三日葬於洛陽縣界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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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정보 시스템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npage=7&View=search&No=36&Code=E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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