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

천헌성 묘지명(泉獻誠墓誌銘)

상 상 2011. 10. 7. 07:55

헌성은 남생(男生)의 아들이다. 즉 연개소문의 손자이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남생이고, 남생의 아들이 여기 나오는 헌성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문구는 다음과 같다.

 

1) 고구려 사람으로써 증조부(曾祖父)인 대조(大祚)를 가리켜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기세(氣勢)가 삼한(三韓)을 제압하고 명성은 5부(五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라는 문구이다.

 

이것으로써 고구려가 삼한의 땅임을 다시한번 증명해 주었다.

다시말해서 삼한이 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이것을 단재선생은「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전삼한(前三韓)이라고 불렀고

남쪽으로 내려온 삼한을 후삼한(後三韓)이라고 불렀다.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바로 이 후삼한(後三韓)이고

남쪽으로 옮겨오기 이전 북방에 있던 삼한을 전삼한(前三韓)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삼한이란 진번막 삼조선이라고 하였다.

진번막(眞番莫) 삼조선 즉, 진조선(眞朝鮮) 번조선(番朝鮮) 막조선(莫朝鮮)이 전삼한(前三韓)이고,

진번막(眞番莫)은 곧 진변마(辰弁馬)라고 하였다.

 

따라서

진조선(眞朝鮮)은 진한(辰韓), 번조선(番朝鮮)은 변한(弁韓), 막조선(莫朝鮮)은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 대하여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진조선(眞朝鮮)의 옛 땅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番朝鮮)의 옛 땅

막조선(莫朝鮮)은 대개 압록 이동이 모두 그 옛 땅』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고진의 묘지명에서 나온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 이라는 글귀이다.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진조선(眞朝鮮)의 옛 땅’이니,

고구려가 바로 옛 진한(辰韓)이라고 한 것인데

바로 이것이 고진의 묘지명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구려 왕가의 자손인 고진을 가리켜 ‘진한(辰韓)의 영족(令族)’이라는 문구가 나옴으로써 고구려가 진한(辰韓)임이 밝혀졌고

따라서 단재선생의 말씀이 역사적 진실로 밝혀진 것이다.

 

다시말해서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가 역사적 진실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래서 여기 헌성(獻誠)의 묘지명에서도 헌성을 「변국공(卞國公)으로 습봉(襲封)」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 다음 삼조선과 삼한의 관계에 대하여서

 

『진막번(眞番莫)이나 진마변(辰弁馬)는 모두 ‘신’ ‘불’ ‘말’로 읽을 것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신 불 말 세 나라의 뜻이요,

진 변 마 삼한은 신 불 말 세 왕의 뜻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즉, 삼조선은 세 나라이고 삼한은 세 임금인데

중국인들이 잘못 전해듣고 삼한을 세 나라로 알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삼조선을 삼한으로 진한이니 변한이니 마한이니 이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2) 「자식으로 현은(玄隱), 현일(玄逸), 현정(玄靜)이 있다」는 글귀도 봐두어야 할 문구이다.

 

3) 「9세 때에 본번(本蕃:고구려)에 있으면서 선인(先人)의 직책을 받았다」는 문구도 매우 의미있는 글귀이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 묘지명에서 여러번 나오는데 화랑과 관련된 매우 의미심장한 글귀이 다.

단재선생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을 보면

『화랑은 본래 상고시대 소도제단의 무사(武士)인데, 그때에 선비라고 칭하던 자이며,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 검은 옷)를 입어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선인(先人)으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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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헌성묘지명(泉獻誠墓誌銘)

해석자 : 박한제

 

대주(大周)의 고(故)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우우림위상하(右羽林衛上下),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으로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으로 추증(追贈)된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조의대부(朝議大夫)로 [부]창([父]昌) 선부(膳部) 원외랑(員外郞), 호군(護軍)에 임용되었던 양유충(梁惟忠)이 찬(撰)하였다.

 

군(君)의 휘(諱)는 헌성(獻誠)이며 자(字)도 헌성(獻誠)이다. 그 선조(先祖)는 고구려(高句驪) 사람이다.

무릇 (그 자손이) 길게 물결치고 넓게 퍼져나가서 강물의 후손처럼 되었고, 등잔이 뒤에서 비추고 그 빛이 앞으로 나아가듯이 하여

해의 자식처럼 되었으니, 가지와 잎이 성하고 울창해져서 세세도록 번상(蕃相)이 되었다.

 

증조(曾祖)인 대(태)조(大(太)祚)는 본국(本國 : 高句驪)에서 막리지(莫離之)에 임용되었으며,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기세(氣勢)가 삼한(三韓)을 제압하고 명성은 5부(五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조(祖)인 개금(盖金 : 蓋蘇文)은 본국(本國 : 高句驪)에서 태대대로(太大對盧)에 임용되고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아버지가 이어주고 아들이 계승하여 권력을 잡고 총애받음이 두드러졌다.

부(父)인 남생(男生)은 본국(本國 : 高句驪)에서 태대막리지(太大莫離之)에 임용되었으며,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귀속하니 당나라는 특진(特進)에 임명하고 사지절(使持節),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검교우림군(檢校羽林軍)을 겸하게 하였다가 이내 장내공봉仗內供奉),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에 임명하고 병주(幷州)·익주(益州) 2주(州) 대도독(大都督)에 추증하니 시호(諡號)는 양(襄)이다.

 

지혜와 식견이 밝고 분명하였으며 기개와 품성이 매우 빼어났다. 위약한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때,

아우들이 형에게 불륙(不睦)하여 그 빈틈을 엿보았으니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은 흉악함을 함께 하고 서로 도와서

남건(男建)은 첩치(捷淄)의 화(禍)를 쌓았으며 남산은 공숙(共叔)의 모략을 품었다.

양공(襄公)은 이러한 난국(亂局)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亂局이) 그칠 날을 기다릴 수 없다고 여겨,

나라가 흥하면 군자(君子)가 제위(帝位)에 있게 되고 나라가 망하면 현인(賢人)은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피하여 머무르지 않고 당나라로 가서 배알하기를 청하였으니, 곤야(昆邪)가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귀항하여 열후에 봉해진 것이나 유여(由余)가 나라를 떠나 진(秦)나라에 귀속되어 객례(客禮)로서 우대받은 것과 같았다.

 

공(公)은 바로 양공(襄公)의 적저(嫡子)이다. 소맥(小貊)의 고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대성(大成)할 쓰임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역이 번성하고 가문이 총애를 받아 한 나라안에서도 드문 경우였다.

 

9세 때에 본번(本蕃)에 있으면서 선인(先人)의 직책을 받아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대접하니

요우(遼右 : 遼東)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풍속과 의례를 아름답게 하고 병술을 익혀 넓은 도량을 품으니 깊이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처음 양공이 밖으로 부(部)를 살피러 갔을 때 공(公)도 역시 따라갔다.

남건과 남산 등의 흉악함이 미쳤을 때 공의 나이는 겨우 16세였다. 재난이 갑자기 일어나자 의논하는 자들은 머뭇거리거나

혹은 나아가 싸울 것을 권하였지만 계책 중에 바로 따를 만한 것이 없었다. 공은 손가락을 굽혀 적을 헤아리고서 (대적하는 것이)

결국 불가능하다고 여겨 양공에게 국내의 옛 도성에 머물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권하였다.

(그리고) 양공에게 이르기를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中國)에 입조하게 하되 정성과 성심을 다하면 중국에서는

대인(大人)이 왔음을 듣고 반드시 흔연히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서 병력을 청하고 연합하여 토벌을 하게 되면 이것은 안전하고

반드시 승리를 하게 되는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추장들에게 이르기를

“헌성의 말은 심히 택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날로 수령(首領)인 염유(冉有) 등을 파견하여 입조하게 하니

당나라의 고종은 친히 조칙을 내려 위무하고 다시 양공을 동도주인(東道主人)으로 삼고 대총관(大摠管)을 겸수(兼授)하였다.

공은 물러나고 나아가는 계략을 도모하고 옳고 그른 방책을 가리며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안위(安危)를 잘 헤아렸으므로

서쪽에서 중국의 병력을 끌어들여 동쪽으로 요동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양공이 가(家)를 보존하고 국(國)을 계승시킨 것은

실로 공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이윽고 양공이 명을 받아 수도에 이르러 은혜에 감사하니 천자는 그를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배(拜)하고 자포(紫袍), 금대(金帶)와 어마(御馬) 2필을 하사하였다. 함주(銜珠)·패옥(佩玉)은

무릇 허저(許褚)가 받은 영예와 동등하며 석수(錫綬)·반금(班金)은 더욱이 호한(呼韓)이 받은 선물과 같았다.

얼마 지나서 위위정경(衛尉正卿)으로 옮기니 지체가 높아지고 공적이 쌓여 직위(職位)가 마치 하해(河海)와 같았다.

의봉(儀鳳) 4년(679) 아버지의 상(喪)을 당함에 슬퍼하여 초췌해짐이 예(禮)를 지나쳤는데, 궁중에서 보낸 사신이 조문을 하러 왔으며

도로에 (조문객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조모(祖母)는 공이 마실 것도 끊고 슬피 울면서 더욱 서글픈 생각을 더하며 매번 힘써 권하나

따르지 않으므로 공을 위하여 음식을 끊었다. 공은 이로 인하여 조금씩 음식을 먹음으로써 (조모의) 자애로운 모습을 깨달았다.

사랑스레 양육함의 깊음은 이건(李虔)의 조모만이 아니고 효성으로 감사함의 지극함은 어찌 정회(程曾)의 손자만에 그치겠는가.

조로(調露) 원년(元年 ; 679) 9월에 상중이지만 양군(襄軍)을 맡아서 반란(叛亂)을 토벌하는 대사(大使)로서 출사(出仕)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는데 전난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공도 고사(固辭)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며 돌아올 때에 공적을 드러내어

상주국(上柱國)에 제수되었다. 개요(開耀) 2년(682)에 변국공(卞國公)으로 습봉(襲封)되어 식읍(食邑)이 3천호(三千戶)에 이르러

제후의 훈공(勳功)을 높이고 상지(賞地)의 업(業)을 전하였다. 영순(永淳) 원년(元年 ; 682)에 조모의 상을 당하여 적자임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광택(光宅) 원년(元年 ; 684) 10월에 운휘장군(雲麾將軍)에 제수되고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운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에 임용되었으며 훈봉(勳封)은 모두 예전과 같았다. 또한 그 달의 29일에는 칙령을 받들어

우우림위상하(右羽林衛上下)가 되었으니 매우 중요한 대신으로 수하들이 깊이 의지하였으며 넓고 깊은 덕행이 두루 미치고

심원(深遠)한 은혜가 드러나게 되었다. 수공(垂拱) 2년(686) 3월에는 칙서를 받들어 신무군대총관(神武軍大摠管)이 되어

제색병(諸色兵)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적의 경내(境內)에 들어갔다. 공은 풍각(風角)을 교묘히 익히고 조수(鳥獸)의 동정을 살피는데

깊이 통달하여 산천(山川)이 기복(起伏)을 이룬 형세와 들판이 펼쳐져 있는 판도가 암암리에 검결(鈐決)과 맞아떨어지고

가슴 속과 꿰뚫어 부합하였다. 차례로 우회하여 강을 에워싸니 적의 무리는 대부분 도망을 쳐버려 선전(善戰)이란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함은 이것을 두고 이르는 것이다. (垂拱) 4년(688) 9월에 칙서를 받들어 용수도대총관(龍水道大摠管)에 임명되고

예주(豫州)의 반란을 토벌하여 비단[綵] 100단(段), 어마(御馬) 1필(匹)을 하사받았으며 이윽고 적이 평정됨에 (토벌을) 중지하였다.

천수(天授) 원년(元年 ; 690) 9월에 우위대장군(左衛大將軍),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다.

(天授) 2년 2월에는 칙서를 받들어 검교천추자래사(檢校天樞子來使)로 임명되고 현무(玄武) 북문(北門)에서 대의(大儀)에 필요한

동(銅) 등의 운송을 감독하는 임무도 겸하였는데 일이 끝나기 전에 역적(逆賊)인 내준신(來俊臣)을 만나게 되었다.

(來俊臣은) 형벌과 옥사(獄事)를 농단하면서 위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마침내 공의 처소에 은밀히 접근하여

금백(金帛)과 보물을 요구하였지만 공은 뇌물을 싫어하였으므로 교분을 끊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다른 죄로 모함을 받아 갑자스레 비명(非命)에 죽게되니 나이가 43세였다.

슬프도다. 손수(孫秀)는 석숭(石崇)의 재화를 이용하고 부씨(符氏)는 왕가(王家)의 근심에 미쳤으나 갑자기 황제의 총명함이

환히 비추고 천자의 은택이 맑게 빛나서 깊은 원한을 풀어 죄가 아님을 입증하고 조서를 내려 극히 칭송하였다.

한나라의 황제가 조착(晁錯)를 한스럽게 주살함에 한숨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진(晉)나라의 황제가 마돈(馬敦)을 추증(追贈)함에

삼가 영총(榮寵)을 더하였던 것이다. 구시(久視) 원년(元年 : 700) 8월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고(故)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우우림위상하(右羽林衛上下),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천헌성(泉獻誠)은 명망이 높고 번인(蕃人)으로 귀복(歸服)하여

총애의 입음이 두루 이루어졌는데 정의(情誼)가 매우 깊고 기품이 온후하였으므로 발탁하여 친근(親近)에 두고 금병(禁兵)을 맡겼다.

무고(誣告)함이 갑자기 일어나 억울한 형벌을 받으니 원통함을 헤아리지 못하겠구나.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행적은 되풀이하여

이야기되고 있지만 말과 생각은 지나쳐 가니 진실로 매우 애석하고도 슬프도다. 기리고 칭송함이 미치지 못하니 마땅히 영예(榮譽)를

추증(追贈)하여 무덤이 아직 굳지 않았을 때 반드시 개복(改卜)하고 삼가 번성한 의식을 더함으로써 영혼을 위로하는도다.

가히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에 추증하고 물품(物品) 100단(段), 장사(葬事)날에 필요한 양▨(量▨), 명주 천막, 일꾼 들을

하사한다. 그의 아들인 무기위(武騎尉), 유성현개국남(柳城縣開國男) 천현은(泉玄隱)은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좌옥검위(左玉鈐衛),

우사계(右司階),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으로 승진시키며 훈봉은 예전과 같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상(賞)이 세세도록 이어져 휴맹(眭孟)의 자식이 낭(郎)이 되고 죽어서도 명성을 나타내 수무(隨武)의 혼(魂)이

역할을 할 수 있던 것과도 같다. 자식으로 현은(玄隱), 현일(玄逸), 현정(玄靜)이 있어서 (그 비통함은) 서리를 밟고 이슬을 맞으며

마음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어제와 오늘이 차례로 지나가면 언덕도 쉽게 무너짐을 두려워하여 이에 옛 터를 넓혀서

새로운 무덤을 만드니 만가(挽歌)의 퉁소소리가 슬프게 들리는구나. 고래(古來)로 단지 오늘이 어제를 바꾸는 것은 아닌데도

길위에 날리는 깃발은 헛되이 펄럭이고 성문(城門)의 조문객은 어찌 그리도 분분(紛紛)한가. 대저 대족(大足) 원년(元年 : 701)

세차(歲次) 신축(辛丑), 2월 갑진삭(甲辰朔), 17일 경신(庚申)에 망산(芒山)의 옛 터에 장사지내니 예(禮)로다. 걸지고 아름다운

교외의 들판은 포금(布金)의 담장에 근접하고 울창한 송백(松栢)은 적석(積石)의 봉(封)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니

그 사(詞)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바닷가 동쪽이여 옛날에 주몽(朱蒙)이 있었도다. 강을 건너 나라를 세우니 세업(世業)이 드높도다. 드높은

세업(世業)이여 해돋는 곳의 자손이라. 자손은 저 누구인가 진실로 천씨(泉氏)로다. 위에서 전하고 아래에서 이음이여

신령함을 머금고 복(福)을 탄생시켰도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돌봄이 있음이여 위험한 나라에서 행하지 않았도다.

저 스스로 번신(蕃臣)으로 천자(天子)에게 내조(來朝)하였도다. 그 오랑캐의 복식(服式)을 버리고 이 중국(中國)에 왔도다.

빛나는 조정의 의식(儀式)과 전장(典章)이여 밝은 예덕(睿德)이여. 가르침을 받고 교화를 입음이여 인자함을 붙들고 곧음을 품었도다.

피리를 불고 종을 치며 수레를 타고 솥으로 끓인 음식을 먹었도다. 公의 어진 형상이여 사나움을 아우르고 굳셈을 붙들었도다.

견식으로 기회와 징조를 모아 정리하고 사리로는 명확함과 우선됨을 처리하였도다. 급박할 때에 묘책이 전장(戰場)에서 생기도다.

오랑캐를 타이르고 화(禍)가 물러감이여 중국에 돌아와 공적이 펼쳐지도다. 하해(河海) 같은 지위여 당여(黨與)의 의지함이여.

나가고 들어옴에 광채가 빛나고 총애의 사여(賜與)가 빈번하도다. 늠늠한 풍채여 조화로운 예절이여. 충효(忠孝)가 가문(家門)에

전해지고 산하(山河)가 그 땅을 상(賞)주도다. 위에 있으면 충성스럽고 명석함을 사용하니 끓어오르는 듯하도다.

점차 배어들어감이 진실로 필연(必然)이도다. 단지 몸이 죽었다고 말하여도 인자함으로 온전히 할 수 있었도다.

빛나게 두드러진 추증(追贈)이여 실로 평평해진 언덕을 위무하는도다. 낙양(洛陽)의 천맥(阡陌)과 망산(芒山)의 구릉이여.

가슴 답답한 긴 글로 궁벽함을 채워 어찌 받들겠는가. 비탄스런 세세(世世)에 흙 먼지는 사라지고, 해마다 보이는가 아름드리 나무여.

이러한 이유로 후장(厚葬)의 유래하는 바를 생각하여 송종(送終)의 중요함을 아는도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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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헌성묘지명(泉獻誠墓誌銘)

판독자 : 박한제

 

大周故左衛大將軍右羽林衛上下上柱國卞國公贈右羽林衛大將軍泉君墓誌銘幷序

朝議大夫行父昌膳部員外郎護軍梁惟忠撰

君諱獻誠字獻誠其先高句驪國人也夫其長瀾廣派則河之孫燭後光前乃日之子柯葉森鬱世爲蕃相」

曾祖大祚本國任莫離支捉兵馬氣壓三韓聲雄五部祖盖金本國任太大對盧捉兵馬父承子襲秉權耀」

寵父男生本國任太大莫離之率衆歸唐唐任特進兼使持節遼東大都督右衛大將軍檢校右羽林軍仍」

仗內供奉上柱國卞國公贈幷益二州大都督謚曰襄智識明果機情朗秀屬孱王在國不弟閱墻有男建」

男產同惡相濟建蓄捷菑之禍產包共叔之謀襄公覿此亂階不俟終日以爲國之興也則君子在位國之」

亡也則賢人去之避危邦而不居通上京而請謁昆邪之率衆降漢卽拜列侯由余之去國歸秦先優客禮」

公卽襄公嫡子也生於小貊之鄕早有大成之用地榮門寵一國罕儔九歲在本蕃卽拜先人之軄敬上接」

下遼右稱之美風儀工騎射宏宇瓌量幽淵不測初襄公按部于外公亦從焉洎建產等兇邪公甫年十六」

時禍起倉卒議者猶豫或勸以出鬪謀無的從公屈指料敵必將不可乃勸襄公投國內故都城安輯酋庶」

謂襄公曰今發使朝漢具陳誠款國家聞大人之來必欣然啓納因請兵馬合而討之此萬全決勝計也襄」

公然之謂諸夷長曰獻誠之言甚可擇卽日遣首領冉有等入朝唐高宗手勅慰喩便以襄公爲東道主人」

兼授大摠管公圖去就之計審是非之策不踰晷刻便料安危故能西引漢兵東掃遼祲襄公之保家傳國」

實公之力也尋授襄公命詣京師謝恩 天子待之以殊禮拜右武衛將軍賜紫袍金帶幷御馬二匹銜珠」

佩玉方均許褚之榮錫綬班金更等呼韓之賜頃之遷衛尉正卿門樹勲績軄惟河海儀鳳四年丁父憂哀」

毀過禮中使借問道路相屬祖母以公絶漿泣血益增悸念每勉强不從則爲之輟食公由是稍加飮啜以」

喩慈顏愛養之深不獨李虔之祖母孝感之極豈止程曾之順孫調露元年九月有 制奪禮充定襄軍討」

叛大使金革無避非公所能辭也使還錄功授上柱國開耀二年襲封卞國公食邑三千戶崇建侯之勲傳」

賞地之業永淳元年丁祖母憂以嫡去軄光宅元年十月 制授雲麾將軍守右衛大將軍員外置同正員」

勲對竝如故又奉其月廿九日 勅令右羽林衛上下心膂大臣爪牙深寄汪濊德澤綢繆恩奬垂拱二年」

三月奉 勅充神武軍大摠管部領諸色兵西入寇境公妙閑風角深達鳥情山川起伏之形原野孤虛之」

勢莫不暗符鈐決洞合胸襟次廻滿川賊徒大去善戰不陣斯之謂歟四年九月奉 勅充龍水道大摠管」

討豫州反叛賜綵一百段御馬一匹尋屬賊平遂止天授元年九月 制授左衛大將軍員外置同正員餘」

竝如故二年二月奉 勅充檢校天樞子來使兼於玄武北門押運大儀銅等事未畢會逆賊來俊臣秉弄」

刑獄恃搖威勢乃密於公處求金帛寶物公惡以賄交杜而不許因誣陷他罪卒以非命春秋卌二嗚呼孫」

秀利石崇之財符氏及王家之患遽而 皇明燭曜 天波藻濯雪幽寃以非罪申渙汗於褒崇漢帝之恨」

誅晁錯非無太息晉皇之追贈馬敦式加榮寵久視元年八月乃下制曰故左衛大將軍右羽林衛上下上」

柱國卞國公泉獻誠望高蕃服寵被周行情款深至器懷溫厚擢居親近委以禁兵誣構奄興寃刑莫究歲」

月遄邁狀跡申明言念過往良深悼惜褒崇靡及宜在追榮窀穸未周當須改卜式加縟禮以慰營魂可贈」

右羽林衛大將軍賜物一百段葬日量▨縵幕手力其男武騎尉柳城縣開國男玄隱可遊擊將軍行左玉」

鈐衛右司階員外置同正員勲封竝如故賞延于世眭孟之子爲郎歿而垂聲隨武之魂可作有子玄隱玄」

逸玄靜踐霜濡露崩襟殞神懼今昨遞遷陵谷頹易乃拓故域建新墳簫挽之聲哀以聞古來不獨今逆昔」

陌上飛旌空靡靡郭門弔客何紛紛粤以大足元年歲次辛丑二月甲辰朔十七日庚申葬於芒山之舊營」

禮也膴膴郊原近接布金之埒蒼蒼松栢由來積石之封其詞曰」

濱海之東兮昔有朱蒙濟河建國兮世業崇崇崇崇世業扶木枝葉枝葉伊何諒曰泉氏上傳下嗣孕靈誕」

祉皇考有屬危邦不履粤自蕃臣來朝 天子削彼左袵遊此中國赫赫朝章 明明睿德餐敎沐化扶仁」

抱則列篪撞鍾軒遊鼎食公之象賢秉厲操堅識綜機兆理措冥先倉卒之際謨謀在旃辭戎禍却還漢功」

宣河海之位爪牙之寄出入光暉頻繁寵賜凜凜風骨邕邕禮義忠孝傳門山河賞地居上則忠用明乃煎」

浸潤之漸誠哉必然苟曰身歿能以仁全光光顯贈實慰平津洛陽阡陌芒山丘隴愊憶長辭充窮奚奉悲」

世世兮塵滅見年年兮樹拱是故思厚葬之所由莫不知送終之爲重」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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