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

고진 묘지명(高震墓誌銘)

상 상 2011. 10. 2. 09:36

※ 고진(高震)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의 손자이다.

 

본문에 할아버지(祖) 이름이 장(藏)이고, 조선군왕(朝鮮郡王)이라는 글귀가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살았고 낙양에서 죽었다. 이 또한 묘지명 본문에 나와 있다.  

 

 

고진의 묘지명에서 주목하여 봐야 할 글귀는 다음과 같다.

 

1) 고구려 사람인 고진을 발해인이라고 한 점이다.

즉, 고구려 사람을 발해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다.

 

수많은 중국사서의 열전(전기)을 보면 발해인이라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고구려 사람 내지 우리민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고진을 가리켜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이라고 말한 점이다.

 

고구려 왕가(王家)가 부여의 귀종(貴種)인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인데

그와 동시에 진한(辰韓)의 영족(令族)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바이다.

 

「고구려 왕가(王家)가 진한(辰韓)의 영족(令族)」이라는 말은 「고구려가 진한(辰韓)」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우리역사의 열쇠를 푸는 매우 귀중한 기록이다.

다시말해서 삼한의 역사를 써야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남쪽의 삼한은 후삼한(後三韓)이고,

이 후삼한이 있기 전에 북쪽에 전삼한(前三韓)이 있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진실임을 또한번 입증한 것이다.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보면,

 

『진번막(眞番莫)은 곧 진변마(辰弁馬)요...(중략)...

진번막 삼조선은 ... 남쪽으로 옮겨오기 이전, 북방에 있던 전삼한(前三韓)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전삼한(前三韓) 강역에 대해서,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의 옛 땅』이고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곧 신한의 부분인 진조선(眞朝鮮)의 옛 땅』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번조선(番朝鮮)은 변한(弁韓)을 말하고

진조선(眞朝鮮)이 진한(辰韓)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진한(辰韓)임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즉, 고구려가 진한(辰韓)임이 밝혀진 것이다

 

다시말해서 단재선생이 말씀하신 전삼한(前三韓)의 명칭과 위치가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고

단재선생의 전삼한(前三韓) 설이 진실임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면 알수록 단재선생의 말씀이 우리역사의 진실임을 다시한번 알수 있다 !

 

3) 아래부분을 보면

고구려 왕족인 고진을 가리켜 「조선귀족」이라고 또다시 말함으로써

고구려 사람이 바로 조선인(고조선인)임을 다시한번 확인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을 조선귀족이라고 말함으로써

고구려 사람 = 조선인(고조선인) = 부여 사람 = 진한 사람임을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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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 묘지명(高震墓誌銘)

해석자: 박한제

 

 

당(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공부상서(工部尙書) 특진(特進)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

안동도호(安東都護) 담국공(郯國公) 상주국(上柱國) □□공(□□公)의 묘지(墓誌) 및 서(序)

헌서대제(獻書待制) 양경(楊憼)이 찬하다.

 대력 8년 하(夏) 5월 27일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 안동도호(安東都護)인 □□공(□□公)은

낙양 교업리(敎業里) 사제(私第)에서 훙거(薨去)하였으니 춘추는 73세였다.

전년 4월 12일 담국부인 진정후씨가 먼저 박릉군(博陵郡)에서 죽었다.

13년 11월 24일 병인에 낙(수)의 북쪽, 인산(印山)의 남쪽 신영(新塋)에 합장하였으니 예법에 따른 것이다.

 

공의 휘는 진(震)이며 자는 모(某)이며 발해인이다.

조부인 장(藏)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공부상서(工部尙書) 조선군왕(朝鮮郡王)

유성군개국공(柳城郡開國公)이며

부(父)의 휘는 련(連)으로 운휘장군(雲麾將軍) 우표도대장군(右豹韜大將軍) 안동도호(安東都護)였다.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이었으나

교화를 그리워하여 땅을 연 후에도, 대를 이어 왕을 칭하면서 자손이 국빈(國賓)이 되어

식읍이 천실(千室)이나 되었다. 공은 성심과 정성으로 임금을 도와서 힘써 싸움으로써

공훈이 기록되어 무리에서 으뜸이 되었다. 떳떳한 기개로 오랑캐를 막았고,

사봉(司封) 5급을 받았고 자남(子男)으로부터 공후(公侯)로 세워졌으니 관품 9계 중

유격(장군)을 넘어서 개부(의동삼사)로 승진하였으니 이 역시 인신(人臣)으로 스스로 이룩한 것이다.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여 ... 대저 사람됨이 깨끗하고 바탕이 밝았으며 부인의 범절과

어머니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무지개가 걸리니 해를 떨어뜨리고 신선이 막아서니 구름을 줄이고,

동금(桐琴)의 줄이 끊어지고 칼이 물에 잠긴다. 거울이 움직이니 난새가 죽었다. 명(命)이로구나!

 

사자(嗣子)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심택령(深澤令) 숙수(叔秀)는 효성스러움이 강초(江草)를 뛰어넘고

예의범절은 왕상(王祥)보다 높았다. 모와 형을 부축하여 박릉을 출발하여 엄격한 효성을 이루어

낙읍(洛邑)으로 옮기니, 눈길을 밟기를 천리였으며, 슬픔을 품기를 9년이나 하였으니

금석에 그 시종을 적어서 문장에 의탁한다. 명(銘)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

 

그 처음으로, 조선귀족으로 크게도(아름답게도) 왕을 칭하는 것을 버리고,

훈로(獯虜:오랑캐)를 죽여 베어버려 위대한 당나라를 도왔구나.

노룡(盧龍)과 유색(柳塞:柳州, 柳城)지방에서 강역을 도호하였도다.

그 두번째에, 오직 부친은 극히 존숭되는 훈족으로 저모(苴茅)로 식봉을 받았네.

타국에서 가를 이었네.[承家桂玉] 쑥이 묘위의 나무에[松檟] 다다랐네. 인산(印山)의 남록에.

그 세번째에, 모든 인효(仁孝)들이 천리를 (멀다않고) 상여를 붙드네. □를 신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가슴을 찢어내고 창자를 빼어내네. 슬픈 호곡(號哭)이 땅을 치네. 우러러 하늘에[穹蒼] 호소하노라.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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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고진묘지명(高震墓誌銘)

판독자: 박한제

 

唐開府儀同三司工部尙書特進右金吾衛大將軍安東都護郯國公上柱國□□公墓誌(并序)」

獻書待 制楊憼撰」

大曆八年夏五月廿有七日右金吾衛大將軍安東都護」

□□公薨于洛陽敎業里之私茅春秋七十三前年四月」

十二日郯國夫人眞定侯氏先薨于博陵郡以十三年十」

一月廿四日丙寅祔葬于洛之北印山之陽新塋禮也公諱」

震字某渤海人祖藏開府儀同三司工部尙書朝鮮郡王」

柳城郡開國公禰諱連雲麾將軍右豹韜大將軍安東都」

護公迺扶餘貴種辰韓令族懷化啓土繼代稱王嗣爲國」

賓食邑千室公竭丹懇以輔」

主力鬪戰以冊勲雄冠等彛氣遏獯司封五級自子男以」

建公侯官品九階越遊擊而昇開府斯亦人臣之自致也」

享年不永攘崩揀壓地垿沙簏夭落將星夫人淑質明婦」

儀母訓虹梁墜日仙鄣歛雲桐折劒沈鏡移鸞斃命矣嗣」

子朝請大夫深澤令叔秀孝逾江草禮越王祥扶母兄以」

發博陵就 嚴孝而遷洛邑涉雪千里銜哀九冬金石紀」

終文詞見託銘曰」

其一曰朝鮮貴族弈棄稱王戡剪獯虜翊亮  皇唐盧」

龍柳塞都護封疆其二曰惟禰克崇勲族食封苴茅承家」

桂玉遠赴松檟印山南麓其三曰一同仁孝千里扶喪履」

□冒雪裂膈抽腸哀號擗地仰訴穹蒼」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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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정보 시스템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npage=6&View=search&No=36&Code=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