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

천남생 묘지명(泉男生墓誌銘)

상 상 2011. 10. 5. 08:06

생은 연개소문의 맏아들이다.

 

연개소문에게는 첫째 아들 남생, 둘째 아들 남건, 셋째 아들 남산이 있었다.

‘연씨’를 천으로 고친 것은 당고조의 이름이 ‘이연’ 이어서 ‘연(淵)’자를 피하여

같은 뜻을 가진 천(泉)으로 고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하여 볼 문구는

 

1) 『5부(五部)와 삼한(三韓)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다.(五部三韓竝爲臣妾)와

천남생(泉男生)은 5부(五部)의 우두머리이자 삼한(三韓)의 영걸(泉男生五部酋豪三韓英傑)』이다.

 

위 문구에서 5부는 국가를 형성하는 인(人)적 개념으로

삼한은 영역(영토)의 개념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똑같이 고구려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삼한임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가 북쪽에 있었던 삼한의 땅임을 재삼 확인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후삼한(남삼한)이고

후삼한은 북쪽에 있었던 삼한(전삼한)이 내려온 것이다 라는 단재선생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 주는 문구이다.

 

 

2) 두 번째는 고구려의 벼슬 이름이다.

 

나이 9살이 되자 선인(先人)의 지위를 주었다.

아버지가 낭(郞)으로 임용하여 바로 입진지변(入榛之辯)을 토(吐)하였고(?),

하늘의 교묘함을 대신하여 바야흐로 결애지영(結艾之榮)을 올렸다(?).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용하였고

24세에 나머지 관직(官職)은 그대로 하면서 장군(將軍)을 겸하게 하였다.

28세에 막리지(莫離支)로 임용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여 주더니,

32세 때 태막리지(太莫離支)로 더하여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 : 阿衡은 재상, 元首는 軍師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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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

해석자: 박한제

 

대당(大唐)의 고(故) 특진(特進),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겸(兼)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 장내공봉(仗內供奉),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증병주대도독(贈幷州大都督)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중서시랑(中書侍郞), 겸(兼) 검교상왕부(檢校相王府) 사마(司馬) 왕덕진(王德眞)이 찬(撰)하고, 조의대부(朝議大夫),

행사훈랑중(行司勳郞中), 상기도위(上騎都尉), 발해현개국남(渤海縣開國男) 구양통(歐陽通)이 서(書)하다.

 

대저 돌에 담긴 무지개 빛(보석)이면 흙에 따라 산을 빛나게 하고, 물결에 잠긴 진주조개 빛깔 또한 냇물에 의하여

물을 곱게 하나니, 붉은 궁궐문 밀어 열고 보라색 수레덮개로 올라왔네. 오랜 등휘(騰輝 : 가문의 빛나는 전통?)

화헌(華軒 : 貴人의 수레)보다 열 수레 뛰어넘고, 덧보태어진 표가(表價 : 泉男生 當代의 역할 중요성?)

좋은 땅(혹은 변두리 땅?) 다섯 성(城)을 나누었도다. 게다가 동방성차(東方星次)의 각(角)과 저(氐) 두 별이 좋은 별자리

그 자리에 떨어지고, 뒤덮은 파란 바다 명산(名山)의 기색(氣色)에 감응(感應)하구나.

유순(柔順)한 경지(境地)로 발돋움하여 군자(君子)의 근원(根源) 그 실마리를 마련하였으니, 제기(祭器 : 禮儀)를 안고

율려(律呂)를 엿보고 금수(錦繡 : 아름다운 뜻?)를 품어 낭묘(廊廟 : 正殿, 政事를 하는 곳)에 올랐네.

뿌리를 옮겨 구렁에 자리 잡으니 대하(大廈)의 훌륭한 재목되고, 직(職)을 바꾸어 궁중(宮中)으로 들어오니

큰 장군(將軍)의 절기(切寄 : 빼어난 資質?)를 받들도다. 아아, 좋은 보배와 (그것을 싼) 천촉(薦襩?),

좋은 구슬과 (그것을 묶은) 관(棺) 끈을 어떻게 똑같이 이야기할까? 변국공(卞國公)에게서 이것이 드러나는구나!

 

 

공(公)의 성(姓)은 천(泉)이며 휘(諱)는 남생(男生)이고 자(字)는 원덕(元德)으로서, 요동군(遼東郡)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다.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隤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 (霍光의 고사가 있을 것 같으나 未詳)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 : 군주의 大權?)를 가리고(혹은 적시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 : 군주의 영화를 의미?, 典故 未詳)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 : 바탕?)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공(公)은 선조(先祖)로부터의 물려받음으로 경사(慶事)를 이어 그 변책(弁幘 : 신분?)이 왕공(王公 : ?)의 후손과 같았고,

조상(祖上)의 덕택으로 영화(榮華)를 계속 누려 그 패추(沛鄒 : 벼슬?)가 순령(荀令?)의 아들과 같았다.

더벅머리 어릴 때 장난이 없었고, 북상투한 젊었을 때는 무리짓지 않았다. 좋은 수레를 타고 가면 거리에서 옥수(玉粹)를 빛내었으며,

도겸(陶謙)의 비단을 이어서 마을에서 주도(珠韜)를 밝혔다(?). 마음 속의 생각은 산랑(散朗)하고 뚜렷한 긍지가 굉장히 컸으므로,

넓고 뛰어남이 물의(物議)를 빚어내지 않았으며 통분(通分?)이 때와 기회에 막히지 않았다. 서(書)와 검(劍)을 쌍전(雙傳)하여

제자(提蔗?)와 절포(截蒲?)가 모두 묘(妙)하였고(정확한 의미 미상), 금(琴)과 기(碁)를 양완(兩翫)하여 안행(雁行)과

학렬(鶴迾?)이 함께 기울었다(?). 인(仁)에 바탕하여 용(勇)을 이룸으로써 갑작스러운(?) 빠른 번개를 잠재웠으며,

신(信)을 안고 진심으로 함으로써 우착(禹鑿 : 黃河?)에서의 놀란 파도를 다스렸다. 천경(天經)이 다하지 않으니

가르침이 이에 생겼고, 왕도(王道)가 무사(無私)하니 충(忠)이 훌륭한 덕(德)으로 되었던 것이다.

만경(萬頃)의 맑은 호수에서 노니는 이는 그 깊이를 잴 수가 없고, 구인(九仞)의 바깥담에서 말하는 이가 그 집(의 규모)를 헤아릴 수 없다.

 

 

나이 9살이 되자 선인(先人)의 지위를 주었다.

아버지가 낭(郞)으로 임용하여 바로 입진지변(入榛之辯)을 토(吐)하였고(?),

하늘의 교묘함을 대신하여 바야흐로 결애지영(結艾之榮)을 올렸다(?).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용하였고

24세에 나머지 관직(官職)은 그대로 하면서 장군(將軍)을 겸하게 하였다.

28세에 막리지(莫離支)로 임용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여 주더니,

32세 때 태막리지(太莫離支)로 더하여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 : 阿衡은 재상, 元首는 軍師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이으니 선비들의 마음(?)이 열복(悅服)하였으며, 위태로운 나라의 권력을 잡아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이때 당(唐) 천자(天子)의 치세는 문치(文治)를 위주로 하여(?) 호시(楛矢 : 楛는 화살, 전쟁의 의미?)는

건기(褰期 : 褰은 縮과 통하니, 짧았다는 의미?)하였다.

(그런데 당시) 공(公)은 형제간의 정(情)을 살펴보아 안으로 없애기 어려운 잡풀이 있었고,

나라의 근본을 세우려 함에 밖으로 엎어지려는 나무가 있었으니,

마침내 도해지빈(桃海之濱?)으로 하여금 예양(禮讓)에서 8조(八條)의 가르침이 어그러지게 하였고,

소장(蕭墻 : 담장 혹은 君臣間의 가까운 장소?) 안에서는 간과(干戈)에 사우(四羽)가 떨어지게 하였다(?).

(따라서) 공(公)은 내심 내관(內款)을 생각하였으나 일이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되지 않아(?),

바야흐로 나가 변경(邊境)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달래려고 하여 밖으로 황전(荒甸 : 邊方?)을 순정(巡征)하였으니,

 

(고)조선((古)朝鮮)의 옛 땅을 다스려 동방(東方)을 통치하는 새로운 관직(官職)을 (唐에) 요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外征의 틈을 타서) 두 아우 천남산(泉男産)과 천남건(泉男建)은 하루아침에 흉패(兇悖)하여져서

능히 무친(無親)의 차마 못할 짓을 하여 병사를 내어 안에서 저항하였다. 금환(金環 : 금팔찌, 어린?) 유자(幼子)는

갑자기 살륙당하였고, 옥선(玉膳 : 좋은 요리?)과 장연(長筵 : 좋은 자리?)는 머쟎아 고복(顧復 : 부모가 자식을 보살핌?)을

사(辭)하였다(이상의 구체적 의미는 未詳). 공(公)은 형제간의 관계가 소원함으로써 눈물을 머금고 격문(檄文)을 사방으로 보내니

동맹(同盟) 세력이 많이 모여 마침내 단단한 각오로 창을 들었다. 장차 평양을 함락시켜 악(惡)의 근원을 사로잡으려고,

먼저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러 곧 슬견(瑟堅)의 누(壘)를 깨뜨리려 하여, 그 도둑질을 밝히며 북을 울리면서 나아갔다.

 

이에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하여 그 일들을 알리려 하였는데 마침 이반(離反)이 있어

불덕(弗德)은 (그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공(公)은 이로 인하여 요동(遼東)으로 깃발을 돌려 군사를 해북(海北?)으로 옮기고,

그 마음을 천자의 궁궐로 달려 현토성(玄菟城)에서 수신(修身)하면서,

 

다시 대형(大兄) 염유(冉有)를 보내 정성(精誠)스러운 효명(效命)을 거듭 알렸다.

광림(曠林)에 쌓인 형제간의 원망(怨望)에서 먼저 알백(閼伯)의 창을 찾으니,

홍지(洪池)가 가까이에서 노닐며 어찌 우숙(虞叔)의 칼을 탐내겠는가?

황제께서 청구(靑丘)를 밝혀 보시어, 그 (泉男生의) 진실한 간절함을 헤아리시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의 죄를 살피시고, 번개와 천둥 같은 위엄을 내셨다.

환산(丸山)에 아직 새기지 않았으나 득래(得來)는 먼저 깨달음을 드러내시고,

양수(梁水)에 재앙이 없지만 중모(仲謀)는 그것이 반드시 망하리라고 걱정하였음과 같은 것이다

(唐의 올바르고도 빠른 조처를 말하는 듯하나, 典故 未詳).

 

건봉(乾封) 원년(元年 ; 666) 공(公)은 또 아들 헌성(獻誠)을 입조(入朝)시켰다.

황제가 가상(嘉賞)히 여겨 멀리서 공(公)에게 특진(特進), 예전과 같은 태대형(太大兄),

평양도행군대총관겸사지절안무대사(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를 배수(拜授)하여,

본래 번병(蕃兵)을 거느리고 대총관(大摠管) 계필하력(契苾何力) 등과 함께 경략(經略)을 책임지게 하였다.

공(公)은 국내(國內) 등 6성(城)의 10여 만호(萬戶)의 서적(書籍)과 원문(轅門 : 陣, 軍師의 의미?)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목저(木底) 등 3성(城)이 교화(敎化)를 바라 정성(精誠)을 함께 하니,

(唐에 저항하던) 조무래기들은 위태로와지고 날로 달로 궁박해졌다.

 

건봉(乾封) 2년(667) 칙(勅)을 받들어(?) 공(公)에게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 668) 사지절요동대총관(使持節遼東大都督), 상주국(上柱國),

현토군개국공(玄菟郡開國公)으로 식읍 2,000호(戶)를 주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 하였다.

 

소맥(小貊)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소연(巢燕)의 막(幕 : 고유명사 혹은 제비둥지 같이 작은 적의 군영?)이

뒤집어지려 할 때, (唐의) 천자(?)의 명이 있어 개마(蓋馬)의 영(營 : 고유명사 혹은 큰 아군의 군영?)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가을 칙을 받들어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함께 서로 경략(經略)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서 막바로 평양성(平壤城)에 다다르니, 앞에서 노래부르고 뒤에서 춤추며 멀리 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공은 죄인을 벌하여 백성들을 위로한다고 해서 (오히려) 피로 땅을 물들일 일을 안타깝게 여겨 몰래 은밀히 계략을 꾸며

그 기름진 땅을 구제하려 하였으니, 마침내 승려(僧侶) 신성(信誠) 등과 안팎으로 상응하였다.

조성(趙城)을 함락시켜 깃발을 빼앗았는데 어찌 한신(韓信)의 군대를 수고롭게 할 것인가?

업의 성문을 밀어제낀 것은 원담(袁譚)의 장수(將帥)들이 스스로 초래하였던 일인 것이다(?).

(평양성이 저절로 함락되자) 그 왕 보장(寶藏)과 (천)남건((泉)男建) 등이 다 포로가 되었으며,

(高句麗의) 높은 산과 깊은 바다가 함께 (唐의) 경계로 들어왔고, 5부(五部)와 삼한(三韓)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다.

 

 

결국 능히 의(義)를 세우고 은혜를 끊음은 정백(鄭伯)이 준걸(儁傑)을 얻었던 것과 같았으며(?),

화(禍)를 도리어 복(福)으로 만든 것이 기자(箕子)가 공(功)을 이루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 해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등과 함께 서울로 개선하여 들어오니, 공훈을 기록하고 마땅한 의식을 행하였다.

승리를 아뢰는 날 남건(男建)을 바로 주살(誅殺)하려 했으나, 공은 안으로 (형제의) 천륜(天倫(을 절실히 느끼고 겹으로 된

궁궐문에 와서 채숙(蔡叔)의 예를 살필 것을 청하여(이 단락은 未詳), 상(上 : 하늘?)이 감동하고 황제께서 살피시어

관대한 처벌로 하여 (男建을) 공공(共工)(의 예)처럼 유배하였다.

(이와 같은) 형제간 우애의 지극함으로 조야(朝野)에서 이것을 높이 여겼다.

그해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제수(除授)하고, 변국공(卞國公)으로 진봉(進封)하여 식읍(食邑) 3,000호(戶)를 주었으며,

특진(特進)과 훈관(勳官)은 예전처럼 하되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으로써 장내공봉(仗內供奉)하도록 하였다.

(천자가) 예를 낮추어 우대하였고(?) 고관(高官)으로 임용하였으니,

(公은) 귀인(貴人)으로서 ‘중황지서(中黃之瑞)’(관료들?)를 모아 화합하게 하였고 근위(近衛)로서 천자의 자리를 빛나게 하였다.

(公이) 천자의 곁에서 받들었고 주위에서 바빴으니, (천자의) 은총의 높음은 뒤질 바가 없었으며 진심으로 의지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의봉(儀鳳) 2년(677) 칙을 받들어 요동을 안무(按撫)하여 주현(州縣)을 개치(改置)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여 그 아픔을 덜어주었는데,

강부(襁負)하여 돌아와 의지하는 이들이 들을 메웠고(?) 강역(疆域)을 소통하여 경계를 정함에 올바름을 알게 되었다(?).

 

의봉(儀鳳) 4년(679) 정월 29일 (公이) 병을 얻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돌아가시니, 춘추(春秋) 46세였다.

 

진의(震扆 : 天子?)는 북소리를 마음 아파하고 삼공(三公)과 재상(宰相)이 피리 소리를

원통해 하였으며, 4군(四郡 :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未詳, 옛 고구려와 관련?)은 이로 인하여 파시하고

아홉 종족(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未詳)들이 이로 인하여 농사일을 그만두었다.

조(詔)에서 말하기를 “많은 공(功)에 넘치는 상(賞)으로 생전(生前)에 총명(寵命)이 두루 있었으니,

갖은 예(禮)로 추증(追贈)함으로써 슬픔과 영화가 죽은 뒤에도 커게 하라. 충의(忠義)를 드러내어 밝힘에

어찌 삶과 죽음에 차이가 있겠는가? 특진행우위대장군(特進行右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천남생(泉男生)은 5부(五部)의 우두머리이자 삼한(三韓)의 영걸로 신묘한 기지(機智)가 영오(穎悟)하고

갖추어진 식견(識見)이 심원(深遠)하였으며, 신비한 헤아림이 계책에서 드러났고,

큰 재능이 무예(武藝)에서 펼쳤더니, 변방(邊方)에 후미지게 살면서도 진실된 정성을 바쳤도다.

위태한 상황(혹은 나라?)을 떠나 편안한 지경(혹은 나라, 곧 唐?)으로 나아가서 진실로 변통(變通)의 도(道)에 합당(合當)하였고,

(唐에) 순(順)함으로써 (泉男建 등과 같이 唐에) 역(逆)함을 도모하여 능히 요패(遼浿)의 끝까지 맑게 하였다.

훌륭한 공적이 멀리서도 두드러져 높은 관직(官職?)이 맡겨졌다.

들어오면 북군(北軍 : 近衛軍?)을 책임져서 궁중에서 사거(私居)하였으며,

나가면 동쪽 끝에까지 이르러 빛남이 청구(靑丘)를 진무(鎭撫)하였다.

(그런데) 교화(敎化)를 오래 기다리다가 일찍 죽음에 갑작스럽기가 아침이슬보다 앞서니, 그 죽음을 말함에 천자의 슬픔이

진실로 깊어서, 마땅히 (그에게) 연솔(連率)의 반차(班次)를 더하여 추숭(追崇)의 모범을 삼가 기록하노라(?).

가히(그러므로?)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변(幷)·분(汾)·기(箕)·남(嵐)의 4주제군사(四州諸軍事),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하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을 맡은 관청에서는 예(禮)를 갖추었고, 책명(冊命)으로 견포(絹布) 700단(段)과 미속(米粟) 700석(石)을 주었으며,

상장(喪葬)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관급(官給)하였으며,

관청에서는 은전을 베풂이 두터워 동원(東園)의 비기(秘器)를 (빌려?) 주었다.

경관(京官) 4품에 해당하는 관리 1인을 차출(差出)하여 홍려소경(鴻臚少卿)의 관직을 대신하여 감호(監護)하게 하였고,

금군(禁軍)과 군악대(軍樂隊)를 묘소(墓所)에까지 보내어 돌아오게 하였으며,

5품의 관리 1인으로써 천자의 부절(符節)과 새서(璽書)를 가지고 가서 제사(祭祀?)에 조문(弔問)하도록 하였는데, (

조정은) 3일 동안 일을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구(靈柩)가 이르는 날 이로 인하여 5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이들에게

그 집(묘소?)으로 가도록 하였다. 총증(寵贈)의 두터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화(榮華)를 더하였고 애송(哀送)의 성대함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었는데, 효공(考功)을 여러 차례 행하여 시호(諡號)하기를 양공(襄公)이라고 하였다.

 

조로(調露) 원년(元年 ; 679) 12월 26일 임신(壬申)에 낙양(洛陽) 망산(邙山) 땅에 하관(下棺)하니, 예(禮)에 합당하도다.

슬퍼하는 아들 위위시경(衛尉寺卿) 헌성(獻誠)은 일찍이 가정교육을 받들어

이른 나이에 관료의 인끈을 늘어뜨렸다. 관직을 받기 전이나 뒤나 주로(周魯)의 은총(?)은 이미 높았고,

지생지사(知生知死?)하여 조증(弔贈)의 은혜가 두루 많았다.

나물을 데치며 가시나무 장작을 (불을 높이려) 불고 서리를 밟아 이슬을 옮기니(일의 진행을 의미?),

갈마드는 아픔은 없어지며 더욱 기울고 짐진 슬픔은 옮겨가며 안으로 깊어진다(이 문장은 구체적 의미 未詳).

분(魏墳)의 낡은 칠(漆)이 벗겨지니 한대(漢臺)의 밑바탕이 드러나고, 취완(翠琬)을 깎아 전하는 향기는

저승에 이르러 영원하리라(이 문장은 구체적 의미 未詳).

그 사(詞)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삼악(三岳)의 신부(神府)와 십주(十洲)의 선정(仙庭)에서 곡왕(谷王)이 걸물(傑物)을 낳고 산신령이

신령(神靈)스러운 것을 배었네. 나라의 근간(根幹)을 크게 도모(圖謀)하고 인간의 법도를 환히 밝혀,

비단 의복 차려 입고 죄형(罪刑)을 상세히 의논하였도다. 첫번째.

그 사람이 몰래 나와 집안을 잇고 복(福)을 쌓더니, 훌륭하다 봉황(鳳凰)의 아들 천리마(千里馬)의 자식.

지혜를 감추어 가짐이 천책(川積)같고 어짊을 품음은 악치(岳峙)같으니, 주목(州牧)은 칼을 받치고 교옹(橋翁)은 신을 주었네. 두번째.

소란(騷亂)을 없애는 일에 소관(消灌)하여 추로(鄒盧?)에 의지함이 깊었고,

추요(樞要)의 문관(文官)으로 권세 잡고 무직(武職)을 관할하여 요령(要領)을 쥐었도다.

형수(荊樹)에 물수리 날아오르고 노천(蘆川)에 기러기 잠기니, 슬픔을 당하여 눈물 닦으며 (형제간에) 서로 헤어짐을 한탄하였노라. 세번째.

인주(麟洲)에 숙연(肅然)한 그늘 드리우자 천자의 궁궐로 정성(精誠) 바치었고,

조명(朝命)은 은혜롭게 빛나 천위(天威)로써 정벌하였도다. 도적들을 괴멸시키며 별을 바라보니 군사를 움직인지 몇 달,

크게 춤추며 돌아와 바친 것은 개선의 노래와 보고였네. 네번째.

만호(彎弧)는 마주하여 울고 궁궐에 호소하며 황제께 기원하니, 가을날 잡풀이 갑자기 봄 산앵도나무로 다시 꽃피도다.

옥소리 울리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구슬을 머금어 천자를 근위(近衛)하여서, 보검(寶檢)을 연꽃 위에 놓고 향거(香車)를

계수나무에 매어두었다. 다섯번째.

경거(輕車)로 출무(出撫)하여 비단옷 겹쳐 입고 새벽에 나서서, 수혈(穟穴)을 억양(抑揚)하고 단주(亶洲)를 다스렸다.

위엄(威嚴)을 보고 은혜(恩惠)를 바라 햇빛 바라보며 유순(柔順)해졌더니,

처음 단정히 온 수레 얼마 안있어 갑자기 떠나버렸네. 여섯번째.

검혁(劍革)으로 근왕(勤王)하였으니 북소리 들으며 슬픈 천자, 구원(九原)의 용위(容衛)는 삼하(三河)의 병사(兵士)로다.

남으로 소실(少室)을 바라보고 북으로 태사(太史)에 이르니, 바다는 샘(泉이란 姓과 유관?)으로 통하고 산(山)은

(그의) 묘소(墓所)로부터 일어나는구나. 일곱번째.

서리와 이슬은 해마다 쌓이고 세월은 날로 가는데, 둥근 무덤과 만월(滿月)에 텅 빈 들과 소소(疎疎)한 바람 있으리니.

지하(地下)에 송가(頌歌)를 새기고자 좋은 돌에 글을 묻나니, 영원히 빛나라 일대(一代)의 구허(丘墟). 여덟번째.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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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

 

판독자: 박한제 葛城末治 허흥식

 

 

大唐故特進行右衛大將軍兼檢校右羽林軍仗內供奉上柱國卞國公贈幷州大都督泉君墓誌銘幷序」

中書侍郎兼檢校相王府司馬王德眞撰 朝議大夫行司勲郎中上騎都尉渤海縣開國男歐陽通書」

若夫虹光韞石卽任土而輝山蠙照涵波亦因川而媚水洎乎排朱閤登紫蓋騰輝自遠踰十乘於華軒表價增高裂五城」

於奧壤況復珠躔角氐垂景宿之精芒碧海之罘感名山之氣色擧踵柔順之境濫觴君子之源抱俎豆而窺律呂懷錦繡」

而登廊廟移根蟠壑申大廈之隆材轉職加庭奉元戎之切寄與夫隋珠薦䄣楚璧緘繩豈同年而語矣於卞國公斯見之」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原夫遠系本出於泉旣託神以隤祉遂因生以命族其猶鳳產丹穴發奇文」

於九苞鶴起靑田稟靈姿於千載是以空桑誕懿虛竹隨波竝降乾精式摽人傑遂使洪源控引態掩金樞曾堂延袤勢臨」

瓊檻曾祖子遊祖太祚竝任莫離支父蓋金任太大對盧乃祖乃父良冶良弓竝執兵鈐咸專國柄桂婁盛業赫然凌替之」

資蓬山高視確乎伊霍之任公貽厥傳慶弁幘乃王公之孫宴翼聯華沛鄒爲荀令之子在髫無弄處卝不羣乘衛玠之車」

塗光玉粹綴陶謙之帛里暎珠韜襟抱散朗摽置宏博廣峻不疵於物議通分無滯於時機書劍雙傳提蔗与截蒲俱妙琴」

碁兩翫雁行与鶴迾同傾體仁成勇靜迅雷於誕據抱信由衷亂驚波於禹鑿天經不匱敎乃由生王道無私忠爲令德澄」

陂万頃游者不測其淺深繚垣九仞談者未窺其庭宇年始九歲卽授先人父任爲郎正吐入榛之辯天工其代方昇結艾」

之榮年十五授中裏小兄十八授中裏大兄年廿三改任中裏位頭大兄廿四兼授將軍餘官如故廿八任莫離支兼授三」

軍大將軍卅二加太莫離支摠錄軍國阿衡元首紹先疇之業士識歸心執危邦之權人無駮議于時 蘿圖御㝢楛矢褰」

期公照花照萼內有難除之草爲榦爲楨外有將顚之樹遂使桃海之濱隳八條於禮讓蕭墻之內落四羽於干戈公情思」

內款事乖中執方欲出撫邊甿外巡荒甸按嵎夷之舊壤請羲仲之新官二弟產建一朝兇悖能忍無親稱兵內拒金環幼」

子忽就鯨鯢玉膳長筵俄辭顧復公以共氣星分旣飮淚而飛檄同盟雨集遂銜膽而提戈將屠平壤用擒元惡始達烏」

骨之郊且破瑟堅之壘明其爲賊鼓行而進仍遣大兄弗德等奉表入朝陳其事迹屬有離叛德遂稽留公乃反旆遼東移軍」

海北馳心 丹鳳之闕飭躬玄菟之城更遣大兄冉有重申誠効曠林積怨先尋閼伯之戈洪池近遊豈貪虞叔之劍」

皇帝照彼靑丘亮其丹懇覽建產之罪發雷霆之威丸山未銘得來表其先覺梁水無孼仲謀憂其必亡乾封元年公又遣」

子獻誠入朝帝有嘉焉遙拜公特進太大兄如故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領本蕃兵共大摠管契」

苾何力等相知經略公率國內等六城十餘万戶書籍轅門又有木底等三城希風共款蕞尒危矣日窮月蹙二年奉」

勅追公入朝總章元年授使特節遼東大都督上柱國玄菟郡開國公食邑二千戶餘官如故小貊未夷方傾巢䴏之幕」

大君有命還歸蓋馬之營其年秋奉勅共司空英國公李勣相知經略風驅電激直臨平壤之城前哥後舞遙振崇」

墉之堞公以罰罪吊人憫其塗地潛機密搆濟此膏原遂與僧信誠等內外相應趙城拔幟豈勞韓信之師鄴扇抽關自結」

袁譚之將其王高藏及男建等咸從俘虜巢山潛海共入隄封五部三韓竝爲臣妾遂能立義斷恩同鄭伯之得儁反禍成」

福類箕子之疇庸其年与英國公李勣等凱入京都策勲飲至獻捷之日男建將誅公內切天倫請重閽而蔡蔡叔上感」

皇睠就輕典而流共工友悌之極朝野斯尙其年蒙授右衛大將軍進封卞國公食邑三千戶特進勲官如故兼檢校右羽」

林軍仍令仗內供奉降禮承優登壇引拜桓珪輯中黃之瑞羽林光太紫之星陪奉輦輅便繁左右恩寵之隆無所与讓腎」

腸之寄莫可爲儔儀鳳二年奉勅存撫遼東改置州縣求瘼卹隱襁負如歸劃野疎疆奠川知正以儀鳳四年正月」

廿九日遘疾薨於安東府之官舍春秋有六 震扆傷鼙台衡怨笛四郡由之而罷市九種因之以輟耕」

詔曰懋功流賞寵命洽於生前縟禮贈終哀榮賁於身後式甄忠義豈隔存亡特進行右衛大將軍上柱國卞國公泉男生」

五部酋豪三韓英傑機神穎悟識具沈遠秘筭發於鈐謀宏林申於武藝僻居荒服思効款誠去危就安允叶變通之道以」

順圖逆克淸遼浿之濱美勣遐著崇章荐委入典北軍承宴私於紫禁出臨東陼光鎭撫於靑丘佇化折風溘先危露興言」

永逝震悼良深宜增連率之班載穆追崇之典可贈使持節大都督幷汾箕嵐四州諸軍事幷州刺史餘官竝如故所司備」

禮册命贈絹布七百段米粟七百石凶事葬事所須竝宜官給務從優厚賜東園秘器差京官四品一人攝鴻臚少卿監護」

儀仗鼓吹送至墓所往還五品一人持節䝴璽書吊祭三日不視事靈柩到日仍令五品已上赴宅寵贈之厚存歿增華哀」

送之盛古今斯絶考功累行諡曰襄公以調露元年十二月廿六日壬申窆於洛陽邙山之原禮也哀子衛尉寺卿獻誠夙」

奉庭訓早紆朝黻拜前拜後周魯之寵旣隆知死知生吊贈之 恩弥縟茹荼吹棘踐霜移露痛迭微之顯傾哀負趍之潛」

度毀魏墳之舊漆落漢臺之後素刊翠琬而傳芳就黃壚而永固其詞曰」

三岳神府十洲仙庭谷王產傑山祇孕靈訏謨國緯舃弈人經錦衣繡服議罪詳刑(其一)伊人閒出承家壘祉矯矯鳳鶵昂昂」

驥子韞智川積懷仁岳峙州牧廌刀橋翁授履(其二)消灌務擾鄒盧寄沈文樞執柄武轄操鈐荊樹鶚起蘆川鴈沈旣傷反袂」

且恨移衾(其三)肅影麟洲輸誠 鳳闕朝命光寵天威吊伐殄寇瞻星行」

師計月夷舞歸獻凱哥還謁(其四)彎弧對泣叫閽祈帝遽徙秋荼復開春棣鏘玉高祑銜珠近衛寶劍舒蓮香車褭桂(其五)輕軒出撫重錦晨遊抑揚穟穴」

堤封亶洲贍威仰惠望景思柔始襜來軸俄慌去輈(其六)劍革勤王聞鼙悼 扆九原容衛三河兵士南望少室北臨太史海」

就泉通山隨墓起(其七)霜露年積春秋日居墳圓月滿野曠風疎幽壤勒頌貞珉瘞書千齡暐曄一代丘墟(其八)」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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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정보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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