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연구초

평양 패수고(平壤浿水考) - 11

상 상 2011. 8. 6. 15:59

병. 백제 중엽의 관계한 낙랑


평양 낙랑의 구별이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에 백제사를 읽(독-讀)으면

 

고이왕 13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빈틈을 타서 낙랑의 변경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왔다.

유무가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내자 왕은 그들로부터 침공을 당할까봐 염려하여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朔은 帶의 誤이다)方太守王(王은 弓의 誤이다)

遵伐高句麗王乘虛襲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라 하고


분서왕 7년에 “봄 2월에 비빌히군사를 출동시켜 낙랑의 서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春二月潛師襲取樂浪西縣冬十月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薨)”이라 하니,


여기에 4차나 보인 낙랑의 명사를 이제까지(역래-歷來)의 사가들이 의심없이 지금(今) 평양을 가리킨 것으로 알아왔으나,

그러나 이때는 낙랑국이 망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이구-已久하니) 남펴라에 어찌 낙랑이란

가자(假字, 가차자-假借字: 빌려온 글자, 한자-漢字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음이나 새김의 발음만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한 글자)로 그 칭호를 썼으랴.


대개 삼국사기 가운데 본기와 열전의 가장 간결한 자는 백제사라.

거칠부전의 "백제인들이 먼저 공격하여 평양을 깨드렸다(百濟人先攻破平壤)의 말(어-語)에 원인(因)하여

그 연조(年祚)를 따지면,

 

성왕(聖王) 29년에 백제가 일차(一次)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한 대사가 있을지어늘 본기에 이를 누락하며,

문무본,기 당서, 일본서기 등을 대조하면 부여 복신(福信)의 큰 재능(융재-隆才)과 전략과 충절은

예와 지금(고금-古今)에 동등함(윤비-倫比)이 없는 백제 말엽(말일-末日)의 거인이어늘

열전에 이 같은 거인을 내다 버렸(유기-遺棄)으며,


자치통감의 "부여는 처음 녹산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백제에 의해 파괴되었다(扶餘初居鹿山爲百濟殘破)"의 기사로 보면

지금(今) 합이빈이 백제의 땅이 되었거늘 본기나 열전에 그런 말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저근(姐瑾: 사람 이름)과 사법명(沙法名: 사람 이름)의 공적을 찬양한 남제서(南齊書) 가운데에

동성왕의 국서(國書)로 보면,

동성왕때에 척발위(拓跋魏: 북위)의 누(수)십만 대병을 전승하여

국세가 매우 강성하였거늘 동성왕 본기중의 백제는 어찌 그리 미약하며,


송서의 "백제가 요서의 진평을 침략하여 차지하였다(百濟略有遼西晉平)"으로 보면

어느 때 백제의 해외 발전이 지금(今) 영평부 등까지 미쳤거늘

양(두) 왕의 본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며,


건국설(建國說)은 십제(十濟), 백제(百濟) 등의 부당한 사실과 다른 해석(곡해-曲解)나 남아 있으며

망국(亡國)의  남겨진 터(유허-遺墟)에는 조룡백마(釣龍白馬)의 적장(敵將)을 숭배하는 도깨비 이야기(귀화-鬼話)만 끼쳐있고,

정작 자가의 문화상 정치상 아름답고(미-美하고), 선(善)하고, 웅대한 무엇은 볼 것이 없으니

이는  적국 군인의 병화에 불탄 (적인-敵人이 병화-兵火에 분탕-焚蕩된) 문헌의 재앙(액-厄)보다

사실을 뒤집은(전도-顚倒) 나말(羅末: 신라 말) 문사(文士)의 곡필(曲筆: 바른대로 쓰지 아니함)의 죄가 더 많음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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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