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문제 중 세번째는 조선의 흥망 변천한 사적이다.
이는 재료가 연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나 이 문제를 또한 2분하니,
(가) 단군, 기자(箕子)의 대체(替代), 즉 기자(箕子)가 일개 중국 망명객으로 들어오자
어떻게 단군을 대신(代)하여 왕이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단(壇)은 수두요, 수두는 고대의 조선 전체를 총칭한 이름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때 제왕은 오직 제1세 왕검과 제2세 부루가 고기에 보일 뿐이요,
기자(箕子)와 그 후예라 운운(云)하는 조선왕 부(否), 조선왕 준(準)은 조선사략에 보였으나
사실 기자(箕子)의 일은 사기, 한서와 소설류의 삼재도회에서,
부와 준의 일은 위략에서 베낀(初出) 것뿐이라.
이조(李朝) 이전의 조선인의 붓으로 쓴 기자(箕子)의 사실(史實)은
겨우 삼국유사에 “단군(壇君)…피기자(避箕子: 기자를 피하여)”의 십수 자이며,
삼국사기에 “기자는 주 왕실로부터 봉함을 받았다.(箕子受封於周室)”의 7자가 쓰였으니
이것은 사기에 적힌 것을 베낀(抄錄) 것이라.
신라 말의 유일무이한 중국 숭배자로 제왕연대력을 쓴 일종의 사가(史家) 최치원도
일찍 한 마디 말도 기자(箕子)에게 미침이 없음은 어찌된 까닭(何故)이며,
위서(魏書)에 단군왕검을 기록(記)하였는데
그와 동시대(同時)의 저작인 삼국지와 위략에는 왕검을 빼고 기자(箕子)만 기재(載)하여
부여 고구려 등의 문명을 기자(箕子)에게 공이 돌아가게(歸功)하였음은 어찌된 까닭(何故)이며,
삼국유사(遺事)의 말과 같이 단군이 왕위(位)를 물려(退) 기자(箕子)에게 주었다 하면
신단수림(神壇樹林)의 권위가 이미 쇠퇴하여 죽은(衰死) 징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자(箕子) 이후 천여 년에 해모수 해부루 고주몽이 모두 단군 혹 단군의 아들(단군자:檀君子)라 칭함은 어찌된 까닭(何故)이며,
또는 삼국 초엽까지 조선 전체를 진단(震壇)이라 칭하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어찌된 까닭(何故)인가.
중국사에 조선에 관한 무슨 말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조선사 어느 책장에 집어넣고,
만일 저들과 우리(彼我)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면,
자기의 추측으로 한 두자를 개정 혹 첨부하여
없는 사실을 날조함은 역대 사가의 관습이니
삼국유사(遺事)에 단군...피기자(檀君…避箕子: 단군이...기자를 피하여)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명백한 반대의 증거가 없는 이상에는 일종 의문으로 고대의 기록을 깨치지 못할 것이라.
아직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에는 기씨 연대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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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전후 삼한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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