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문제 중 두번째는 삼조선의 연대다.
지금 사람들이 보통 조선 건국부터 전갑자(前甲子-1924년)까지 4257년이라 하니,
왕검 이후로부터 동 북부여 분립 이전까지
그 사이 아득한 긴 세월의 사적(史蹟)이 전부 없어졌는데(殘缺:잔결),
이것을 어디서 고증하였는가 하면,
고기(古記)에 “단군은 요와 나란히 무진년에 건국하였다(檀君與堯竝立於戊辰)”이라 한 것에 근거(據)하고
소강절이 만든 황극경세서(邵康節皇極經世書)의 당요(唐堯)이래 연대표에 의해 정한 연조라.
그러나 황극경세서에 적힌 연대를 믿을 것이냐.
사주 보는 자가 남의 미래의 행년(行年: 그 해까지 먹은 나이)을 내면 1세부터 70세, 80세까지 내지만,
그 행년(行年: 그 해까지 먹은 나이)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니,
중국 연대를 사마천의 사기에 주소공화(周召共和)로부터 연표를 비롯함은
그 이전 역년(歷年:역대 년도)을 알 수 없는 까닭이어늘
소강절이 자기가 자랑하는 상수학(象數學: 일종의 사주학)으로
아무 증거도 없이
상나라(商)가 기백기십세(幾百幾十歲), 주나라(周)가 기백기십세,
심지어 아무개 제(某帝)는 재위 약간세, 아무개 왕은 재위 약간세…… 등
옛 국가의 운세(古 國祚)와 옛(古) 제왕의 사주를 내었으니,
이러한 것으로 실증을 삼아 중국 연대 중 당요의 기원에 대조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려고 함은 어리석은 행동(愚擧:우거)이다.
고구려의 기록으로부터 전해진
위서의 “이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往在二千歲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가
본문의 전부를 잃고 오직 십수 자(十數字)의 끊어진 구(斷句)로 전하니
(그 기록이) 준거하여 믿을(準信: 준신)할 만한 확실한 가치가 있고 없음을 모르나,
오히려 조선의 고기(古記)라 하므로
고구려로부터 그 이전 2천년이면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距今: 거금) 4천년 내외이니,
이와 같은 이루어진 수(成數: 성수)나 보존 기록(存記: 존기)함이 옳으며,
기자(箕子)도 황극경세서의 주 무왕 연대와 대조하여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距今: 거금)
몇 년(幾年)이라 하지만,
무왕 연대도 또한 당요의 연대와 같으며,
기씨 선우씨의 족보에 의하여 기자를 태조 문성왕이라 하고,
그 이하 마한까지의 시호와 역년(歷年:역대 년도)이 상세히 갖추어져(詳備: 상비)있으나,
태조 문성 등의 시호(諡: 시)가 멀고 먼 옛날(上古)에 있지 아니하며,
혹은 후왕의 추숭(追崇: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이라 하나
조선에서 시법(諡法)을 씀이 삼국 말엽에 비롯하였거늘,
이제 그 이전에 마한 때에 시법(諡法)이 있었다 함도 성립하지 않는(不成) 설이니,
기자는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距今: 거금) 3천년 내외에 조선에 건너온 인물로만 앎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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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전후 삼한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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