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전삼한 강역과 연대
이때까지 진술한 것은 겨우 전삼한 곧 삼조선의 존재한 실제 증거와 그 건립된 원인과 그 국가 제도의 대략뿐이어니와,
이에서 따라오는 3개 문제의 하나는 삼조선의 범위다.
범위에 또 두가지 구별이 있으니
첫번째는 삼조선 각자의 범위요, 두 번째는 삼조선 전체의 범위다.
첫번째의 구별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만주원류고에 요동의 번한현(番汗縣)을 변한(弁韓)의 옛 땅으로 지정한 것이 이치에 가깝다.
대개 삼조선중에 불한의 관할 지경이 가장 중국과 가장 가까운 까닭에
발조선이란 명사가 가장 먼저 중국인의 서적에 보인 바이다.
연왕 희(燕王 喜)가 조선을 침략하여 영평부의 노룡현(盧龍縣)을 요서라 하고
그 이동을 요동이라 칭하였은 즉,
불한의 서울이 당시에 안쪽으로 옮겼으나(아래 글에 상세히 논함),
당초에는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의 옛 땅 이었을 것이며,
후삼한중 변진 양 한은 옮겨온 것이나 마한은 본토에 있던 것이니,
마한의 전신인 막조선은 알기가 쉽다 할 것이나,
다만 위만의 난에 임진강 이북을 전부 잃었으니
그 본토의 전체로 말하면 대개 압록 이동이 모두 그 옛 땅 이었을 것이며,
신한의 옛 땅은 가장 밝혀내기 어려우나,
신한은 임금의 겸임(兼任)인즉 왕검성 즉, 지금 해성현(海城縣)이 그 서울이라 하면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곧 신한의 부분인 진조선(眞朝鮮)의 옛 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조선이 구별이 명확한 각별한 국가가 아니요 다만 신한의 통치하에 약간의 구별을
가진 국가가 될 뿐이다.
동국강목의 “단군의 강역은 북으로 흑룡강에 이르고 남으로 조령에 이른다.
(檀君疆域北至黑龍江南至鳥嶺)”가 삼조선 전체의 강역이 될 것이나
흑룡강 조령 등은 고대 명칭이 아닌즉 옛 사서(史書)에서 나온 기록이 아니요 후세 사람의 억설(억측 설)이다.
그러나 후삼한의 진변(辰弁)이 옮겨오기 이전에는
조령 이남이 거의 황폐하여 사람의 거주가 없었을 것이니, 강목의 억설이 대개 이치에 가까우며,
문헌비고에 고죽(孤竹: 영평부)이 춘추 이후에 조선 소유가 되었다 했으나,
이는 백이를 한족(漢族)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 본국인 고죽을 한족(漢族)의 나라로 인식한 것이다.
건륭의 도서집성에는 고죽을 북이(北夷)의 하나라 하였으니,
이(夷)가 비록 막연한 명사이나 한족(漢族)이 아님은 명백하니,
진개의 전쟁 이전에는 고죽이 조선의 일부이던 것도 명백하다 할 것이며,
사기 흉노전에 ‘상곡 밖을 향한 나라는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한다
(直上谷以往者東接濊貊朝鮮)’이라 하였은즉
조선과 중국과 흉노의 나누어진 경계를 이로써 대강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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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전후 삼한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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