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 | 이듬해(865) 남조가 다시 (수주-雟州를) 공격하여 왔다. 마침 자사 유사진이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은밀히 양림(兩林)지역의 동만(東蠻) 사람들을 약탈하여 모두 내다 팔아 만의 금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양림의 동만이 문을 열어 항복하였고, 남조는 수졸(戍卒)을 모두 죽였다. 유사진은 마침내 만의 신하가 되었다. 하후자는 장인(張茵)이 나약하여, 그 병력을 모두 고병(高騈)에게 주었다. 고병이 병사 5천을 뽑아 강을 건너 옹주에서 임읍(林邑)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용주둔에서 남조를 공격하니, 만(남조)의 추장이 재물과 가축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남조 왕] 추룡(酋龍)이 양집사(楊緝思)를 보내 추천(酋遷)을 도와 함께 안남을 지키게 하고, 범녜사(范胒些)를 안남도통(安南都統)으로, 조락미(趙諾眉)를 부야도통(扶邪都統)으로 삼았다. | ⊙ 당시 여러 도에서 사백(私白.고자 아이)을 올렸는데 민중(閩中.복건)에서 많아, 환관 대부분은 민(閩)사람이었다 양수의 건의에 따라 진남군(鎭南軍)을 홍주(洪州: 강서)에 설치(5월21일) 수주(巂州)자사 유사진이 양림(兩林)의 만족을 약탈하여 남조가 다시 수주(巂州)를 침입하니 양림의 만족은 그들를 받아들였고 남조는 수졸들을 다 죽이니 유사진은 그들에게 항복하였다.(5월) 계관관찰사 엄선을 진남절도사로 삼았다(5월23일) 안남도호 고병은 해문(海門)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아직 나가지 않았는데 감군 이유주가 그를 미워해 제거하려고 누차 진군하도록 재촉. 고병이 5천으로 먼저 나가면 이유주가 군사를 데리고 응원하기로 약속해 놓고 이유주는 뒤를 잇지 않았다.(7월) 고병이 남정에 도착하니 붕주의 만족 무리 5만이 밭에서 수확하고 있어 고병이 엄습하여 대파하고 군사들을 먹였다 |
866 | [함통(咸通)] 7년(866) 6월 고병이 교주에 이르러, 전투를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고,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싸워 적장 장전(張詮)을 베었다. 남조의 이차룡(李溠龍)은 무리 만명을 데리고 항복하였으며, 파풍(波風)의 세 방벽을 점령하였다. 양집사가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병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성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 추천, (범)녜사, (조)낙미를 베고 적의 수급 3만을 바치니, 안남이 평정되었다. 처음에 추룡(酋龍)이 청평관 동성(董成) 등 19인을 보내 성도에 이르렀는데, 절도사 이복(李福)이 [관청의] 뜰에서 그들을 보려 하였다. 동성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정삭(正朔)을 바꾸었으니, 대등한 나라의 예로써 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이복이 허락하지 않았다. 통역을 인도하여 다섯 차례나 왕복을 하며, 해가 져서 사인들이 피로해지도록 논의가 결정되지 않았다. 이복이 노하여 무사에게 명하여 [사자들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욕보이고, 형틀을 채워 관(館)에 매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동(劉潼)이 이복을 대신하여 절도사가 되었는데, 즉시 그 묶은 것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놓아주어 돌려보내자는 표를 올렸다. 조서를 내려 동성 등을 불러 경사(장안)에 오게 하였다. [황제가] 별전에서 그들을 인견하고 물품을 좋은 것으로 후하게 내려준 다음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보고하기를 북정에 속한 회골의 고준이 서주, 북정, 윤대, 청진 등의 성에서 승리하였다고 하였다.(2월) 논공열은 향하는 곳마다 원수를 만들어 받아들이는 곳이 없었다. 원한을 품은 사람이 곽주에서 더부살이하는 것을 선주에 있는 탁발회광에게 알리자 탁발회관이 군사를 이끌고 쳐서 깨뜨렸다.(2월) 하동절도사 유동을 서천절도사로 삼았다(3월2일) 애초에 남조가 수주(사천성 면녕현)를 포위하고 동만의 낭계부(浪稽部)가 그것을 도와 마침내 성을 도륙하였는데, 비롱부(卑籠部)는 남조가 그들의 부형을 죽인 것을 원망하여 당나라 충무의 수병을 인도하여 낭계를 습격, 이를 멸망시켰다. 남조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당을 원망하였다. 남조는 동성 등을 파견하여 성도에 가니 절도사 이복이 예절문제로 동성을 잡아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 유동이 진에 도착하여 그를 풀어주고 장안에 오도록 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위로하며 보냈다.(3월) 성덕(成德)절도사 왕소의가 병을 앓자 형의 아들인 도지병마사 왕경숭에 물려주고 사망 (3月) 토번이 빈녕을 노략질하자 빈녕(邠寧)절도사 설홍종이 격퇴(윤3月) 서천절도사였던 이복을 깎아 기왕의 왕부로 삼았다.(4월7일) 위박(魏博)절도사 하홍경이 죽자, 군대 안에서 아들 좌사마 하전호를 위박유후 세움(6月) 왕경승을 성덕유후로 삼았다(6월) 남조의 추룡은 신천절도사 양집을 파견하여 안남절도사 단추천을 도와 교지를 지키도록 하고 범닐사를 안남도통으로 삼고 조라미를 부야도통으로 삼았다.(6월) 감진칙사 위중제가 7천을 거느리고 봉주에 도착하니 고병은 군사 수를 늘려 남조를 누차 깨뜨렸다. 승리를 알리는 주문이 해문에 도착하면 이유주는 이것을 숨겨서 몇 개월간 소식이 없었다. 당 의종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이유주에게 물으면 이유주는 고병이 군대를 본주에 주둔시키고 도적과 노닐면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당 의종이 화를 내고 왕안권으로 하여금 고병을 대신하게 하고 고병을 소환하여 관직을 깎아내리려고 하였다. 고병은 남조의 만족을 교지에서 크게 깨뜨리고 교지성을 포위하였다.(6월) 하전호를 하박유후로 삼았다(7월) 양수를 선흡관찰사로 삼았다(10월13일) 탁발화광이 곽주에 들어가 논공열을 잡아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그의 무리는 동쪽으로 진주로 달아나자 상연심이 맞아 깨뜨리고 다 영남으로 옮길 것을 상주하였다. 토번은 이로부터 쇠약해져 걸리호의 군신은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다(10월) 고병이 교지(交趾)를 포위한지 열흘 남짓되자 성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왕안권의 편지를 받고 군사에 관한 일은 위중제에게 주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위중제는 이유주가 오자 섬 사이에 숨었다가 이유주가 지나가자 장안에 갔다 당 의종은 상주문을 받고 고병을 다시 안남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이래서 고병은 해문에 도착했다가 돌아왔다. 왕안권은 이유주의 명령을 받았는데 드디어 포위를 푸니 만족 가운데 달아난 사람이 태반이었다. 고병이 도착하여 다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단추천과 주도고를 죽이고 목 벤 것이 3만 여급이 되자 남조는 숨어서 떠났다. 만족 2개동(洞) 격파, 만족1만7천人 귀부해 옴(10월) 정해군(靜海軍)을 안남(安南)에 두고 고병을 절도사로 삼았다(11月)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고병은 안남성(安南城)을 쌓았는데, 주위가 3천보였고 건물 40여만 칸을 만들었다.(11월) 성덕유후 왕경승을 성덕절도사로 삼았다(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