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 | [함통(咸通)] 4년(863) 정월 적의 공격이 더욱 거세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은 함락되었고, 채습의 일족으로 죽은 자가 70인이었다. 이날 밤에 남조는 마침내 성을 도륙내었다. 조서를 내려 모든 군대는 영남을 지키게 하고, 다시 진주경략사 고병(高騈)을 안남도호로 삼았다. 남조가 점차 옹주를 핍박하니, 정우(鄭愚)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택하여 바꾸어 주기를 원하니 강승훈을 영남서도 절도사로 임명하고, 형주(荊州), 양주(襄州), 홍주(洪州), 악주(鄂州)의 병사 1만명을 징발하여 그를 따르게 하였다. 강승훈이 병사가 적다고 거절하니, 마침내 여러 도에서 병사를 크게 일으켜 5만을 보냈다. [함통 4년] 6월, 해문(海門)에 임시로 교주(交州)를 설치하여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산동(山東)에서 병사 만 명을 징발하여 수비를 증강하였다. 그리고 용관경략사 장인(張茵)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어서 안남을 경략하도록 명하였으나 장인(張茵)이 해문에 머무르면서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위주(韋宙)가 병사 나누어 용주(容州)와 등주(藤州)에 주둔시켜 남조의 세력을 분산시키기를 청하였다. | 남조가 교지(交趾)를 함락시켰으며 안남도호 채습이 죽었다.(863년 1월7일) 형남, 강서, 악악, 양주의 장수와 병사 400여 명은 달아났다가 형남유후 원유덕을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와 교지 공격했다가 원유덕 등이 전멸 남조가 2번의 교지점령에 죽이거나·사로잡은 것이 15만명이었다. 남조의 장수 양사진 2만군(軍)으로 교지(交趾)를 점거하자 계동의 이족과 요족은 모두 그에게 항복.(1월) 이런 상황에도 당 의종이 노닐고 잔치하는데 절도가 없자 좌습유 유세가 절제를 상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1월) 천웅군을 진주에 두고 성, 하, 위 세 주를 예속시켰고 왕안실을 천웅관찰사로 삼았다.(2월)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번, 한의 군사 7천을 거느리고 양주에서 승리하였다고 보고(3월) 남만이 우강을 노략질하고 옹주를 압박하자 정우가 스스로 무신에게 옹주를 맡겨달라고 하였다. 이에 의무절도사 강승훈에게 정우를 대신토록 하고 군사를 뽑아 데려 가도록 하였다.(3월) 여러 도적들이 서주(엣 무녕절도)에 들어가 관리들을 죽이니 자사 조경이 그들을 토벌 평정함. (4월18일) 강승훈이 장안에 도착하여 그를 영남서도절도사로 삼고 형, 양, 홍, 악, 4도에 군사 1만을 징발하여 그에게 주었다.(4월) 용관(容管)을 철폐하여, 영남서도에 예속시키고, 다시 공(龔),·상(像) 두 주(州)를 계관(桂管)에 예속시킴(5월13일) 문하시랑 두심권을 진해절도사로 충임하였다.(5월26일) 안남(安南)도호부를 철폐하고, 해문진(海門鎭)에 행교주(行交州)를 두었는데 송융을 행교주자사로 삼고 강승훈은 군의 행영을 관장토록 하였다.(6月) 두종을 봉상절도사에 충임하였다.(윤6월) 다시 해문진에 안남도호부를 두고 송융을 경략사로 삼아 산동의 병사 1만명을 징발하여 그곳에 진수하게 하였다.(7月) 당시 강서·호남에서 군량을 운송하는 사람들은, 상강(湘江)을 거슬러 영거(澪渠.운하), 이수(漓水)로 들어가니 수고롭고 비용이 들며 어려워 여러 군대는 먹을 것이 모자랐다.(7월) 진번석의 건의에 따라 복건(福建)에서 광주(廣州)로 해상운송을 했으나, 관리들의 횡포로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힘들어 하였다.(7월) 영남동도절도사 위주가 만족이 옹주로 향할 것이니 군사를 용주와 등주에 나누어 주둔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8월) 할힐사는 신하 합이난지를 파견하여 경적을 요구하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역서를 요구하도록 하였고 회골을 토벌하고 안서에서부터 모든 것을 당나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니 (당의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호도의 아들 영호호를 좌습유로 삼았다.(10월15일) 숙사(宿泗)관찰사를 폐지하고 다시 서주(徐州)를 관찰부로 만들어, 호주(濠)와·사주(泗州) 예속시킴(11月12日) 남조가 서천을 노략질 하였다(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