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 | [함통] 3년(862) 호남관찰사 채습에게 안남경략초토사를 대신하게 하고 여러 도의 병사 2만을 보내 주둔하여 지키게 하니, 남조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좌서자(左庶子) 채경(蔡京)에게 영남의 일을 처리하게 하자 채경은 채습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하여, 말하기를, “남방은 본래 걱정이 없었는데, 무인들이 공을 바라고 병사를 많이 모아 군량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변방의 병사를 돌려보내 재용을 아끼십시오.”라고 하였다. 채습은 이에 대한 불가함을 주장하고, 여러 번 표를 올려도 답이 없었다. 채경이 돌아와 상주하자, 선위안무사(宣慰安撫使)로 삼았다. 곧이어 광주(廣州)를 떼어내어 따로 세워 영남동도(嶺南東道)로 삼았다. 그리고 옹주(邕州)는 서도(西道)로 하여, 공주(龔州), 상주(象州), 등주(藤州), 암주(巖州)를 소속 주(州)로 하여 채경을 서도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채경은 속이 좁고 고집이 세서 결국 그 곳 군사들에 의해 쫓겨나 등주(藤州)로 달아나서, 황제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향병과 주변 도(道)의 군대를 불러 모아 옹주(邕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는 궤멸하였다. 채경은 강등당해 애주(崖州)에서 죽었다. 계관관찰사(桂管觀察使) 정우로 하여금 절도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남조가 교주(交州)를 공격하여 안남(安南)을 침범하니, 채습이 구원을 청하였다. 호주(湖州) 형주(荊州) 계주(桂州)의 병사 5천을 일으켜 옹주(邕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영남의 위주(韋宙)가 상주하기를, “남조는 반드시 옹관(邕管)을 습격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당 조정은 채습에게 해문(海門)에 주둔하게 하고, 또 정우(鄭愚)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를 나누어 막게 하였다. 채습이 군대의 증파를 요청하니, 산남동도(山南東道)의 병사 1,000인을 보냈다. 남조의 추장(酋將) 양사참, 마광고는 병사 6천을 거느리고 성에 근접하여 진을 쳤다. | 장신을 하중절도사에 충임하였다.(1월) 남조가 다시 안남(安南)에 침입하자 채습을 안남경략사로 삼고 허, 활, 서, 변, 형, 양, 담, 악, 등의 도(道)에서 군사 각기 3만을 징발하여 채습에게 주어 이를 막도록하니 만족은 드디어 떠났다.(862년 2월). 당 의종은 부처를 받들기에 너무 지나쳐서 정사에 게을리 하였다(4월) ⊙ 영남(嶺南)은 예전에 광, 계, 옹, 용, 안남은 모두 영남절도사에 예속시켰는데 채경이 주문을 올려 영남을 나누어 양도(兩道)로 만들기를 청하니 그 말을 쫒았다. 광주(廣州)에 영남동도(東道)절도, 옹주(邕州)에 영남서도(西道)절도 설치(5月) 계관(桂管)의 공(龔)· 상(像) 두 주를 나누고, 용관(容管)의 등(籐)·암(巖) 두 주를 옹관(邕管)에 예속시킴 영남절도사 위주를 영남동도절도사로 채경을 영남서도절도사로 삼았다. 안남경략사 채습이 여러 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안남에 있었는데. 채경이 시기하여 병사들을 본래의 도로 돌려보내라고 하자 조정이 그 말을 좆았다. 채습이 수병(戍兵)5천을 남기도록 요청했으나 거부됨 서주(무녕절도)에서 오만·방자한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온장을 내쫓았다.(7월) 조정에서는 온장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온장을 빈녕절도사로 삼고 절동관찰사 왕식을 무녕절도사로 삼았다.(7月8日) 예전 서천절도사였던 하후자를 좌복야로 삼았다. 무녕절도에는 이전에 6번의 군사반란이 있어 절도사를 내쫓았다. 절도사를 무녕절도사 왕식이 부임해 반란한 군사 수천명을 모두 죽였다.(8月) 도둑의 잔당이 없어지면서부터 무녕이라는 도의 직위는 어려워지는 단계가 되었다. 무녕절도를 서주(徐州) 단련사로 강등시켜, 연해(兗海)절도에 예속시키고. 호주(濠州)를 다시 회남절도로 돌려보내고, 숙주에 숙사도단련관찰사를 두었으며 장수와 병사 3천을 두어 서주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연, 숙, 에 예속시켰다. : 무녕(武寧)절도 철폐(8月28日) 왕식을 무녕절도사로 삼는 동시에 서(徐), 사(泗), 호(濠), 숙(宿)체치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영남서도절도사 채경이 폭정을 하다가 옹주 군사들에게 내쫒겨 등주로 달아나 거짓 칙서와 공토사의 인장으로 토군을 모아 옹주를 공격했다가 패배, 자결하도록 명함. 계관관찰사 정우를 영남서도절도사로 삼았다. 남조가 만족 5만을 인솔하고 안남(安南)에 침입, 안남도호 채습이 긴급함을 알리니 형남, 호남 두 도의 병사 2천과 계관의 3천을 징발하여 옹주에가서 정우의 통제를 받도록 함.(11월) 영남동도절도사 위주의 건의에 따라 채습을 해문에 주둔토록 하고, 정우는 군사를 나누어 방비토록 함(11월) 채습이 증원을 요구하자 산남동도 1천軍을 다시 증파(12月) 이때에 남조는 이미 교지(交趾)를 포위, 안남도호 채습은 농성하여 굳게 지켰으나 구원병은 도착할 수 없었다(12月). 올말(嗢末)이 조공해 옴(862) ⊙ 올말(嗢末)이란 토번에서 노복이라는 호칭, 토번 부유한 층에서 군사발동시 노복을 가지고 참전, 이래서 토번의 무리가 많았던 것. 논공열의 난(842)이후 노복들이 주인을 잃자, 서로규합 부락 만들어, 감(甘), 숙(肅), 과(瓜), ·사(沙), 하(河), 위(渭), 민(岷), 곽(廓), 첩(疊), 탕(宕) 등의 주(州)에 산재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