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06,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51, 7. 남조의 침공-18)

상 상 2017. 3. 29. 17:4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06,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51, 7. 남조의 침공-1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2: 당의 내부모습- 12

내 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874

127일 한림학사 노휴의 상소

관동(關東)지역은 가뭄으로 괵주(虢州)에서부터 바다까지, 보리는 절반만 수확, 추수도 거의 없고 겨울채소도 아주 적어 가는 곳마다 기근이 들었는데, 조세는 가혹하게 거두니 세금 징수를 중지하고 누에치기와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의창을 열어 백성에게 공급해야 합니다.” 칫서를 내려 그 말에 좆게 하였으나 유사가 끝내 시행할 수 없어 빈 글이 되었다.

 

노암이 강릉에 도착하니 관작을 삭탈하고 담주로 유배 보내고 얼마 안 있다가 자진(자살)하라는 명령이 내렸다.(1)

 

우종을 산남동도절도사에 충임하였다(1)

조은을 진해절도사에 충임하였다(2)

유업을 회남절도사에 충임하였다.

위박(魏博)절도사 한윤중 사망이 죽으니, 군대에서 그의 아들 절도부사 한간을 위박유후로 삼았다(11)

남조(南詔)의 재침공(87411~8751)

남조가 서천을 침공하는데, 대도하(大渡河)를 건너다 여주(黎州)자사 황경복에게 패주하였다가, 군을 나누어 몰래 상류와 하류를 건너 황경복을 협격(11)

황경복이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니 남조가 추격하다 복병에게 대패하니, 황경복은 대도하

남쪽까지 갔다가 돌아와 성의 목책을 수리하고 지켰다.

남조는 지라곡(之羅谷)에서 후속부대와 합류, 다시 대도하에서 황경복과 접전, 역시 상류와

하류를 건너 황경복과 연일 싸웠다. 서천에서 구원군이 오지않고 남조는 무리가 날로 많아지니 황경복은 지탱할 수 없어 드디어 붕궤되었다.(11)

당항과 회골이 천덕군(天德軍)을 침구함(12).

감화군(感化軍)에서 도적떼들이 침구하여 약탈하니, 연과운 등의 도()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라고 하였다

남조가 이긴 기세를 타고 여주(黎州)를 함락시키고 공래관(邛峽關)으로 들어와 아주(雅州)

공격하였다. 성도(成都)가 놀라고 시끄러워졌으며 다시 공성전 준비(12)

표신(남조의 왕)이 사신을 서천절도사 우총에게 보내 당 희종을 만나 이간질하고 억눌렸던 일을 하소연할 것이니 서천의 길을 빌리고 성도에 며칠 머물다가 장안으로 가겠다고 하자

양경복이 사자의 목을 베고 욕을 하여 남조군은 신진(新津)까지 진격했다가 돌아갔다.

 

당 조정은 하동, 산남서도, 동천의 군사를 발동하여 원조하게 하였고 천평절도사 고병에게 서천에 가서 남조의 문제를 조치하게 하였다.(12)

 

한간을 위박유후로 삼았다.(12)

상주(商州)자사 왕추. 폭정하여 백성들에 맞아죽음(12)

왕선지의 난(87412~8782)

 

당 희종이 나이가 어려 정치는 신하들에게 있었는데 남아사(정부관원의 관서)

북아사(환관의 관서)가 서로 대립.

의종때부터 사치가 날로 심하였고 군사활동은 쉬지 못하여 조세를 더 가혹하게 징수

관동(關東)에선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들었지만, 주현(州縣)에선 보고하지 않고 덮어버림

백성들은 떠돌다 굶어도 호소할곳 없어, 서로모여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매번 도적과 만나면 당의 군대는 대부분 패배하였다.

이때에 복주(濮州)사람 왕선지가 무리 수천을 모아 장원(長垣)에서 일어났다(12)

875

황소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