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0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9, 7. 남조의 침공-16)

상 상 2017. 3. 24. 18:5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0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9, 7. 남조의 침공-16)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2: 당의 내부모습- 10

내 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870

서천절도사 노탐. 성도(成都) 농성전 준비, 모집 정병 3천 뽑아 '돌장(突將)'이라 칭함(8701)

남조이 미주(眉州)에 이르렀다(15)

남조군이 신진(新津)으로 진군 서천절도사 노탐이 조저에 급한 사정을 알렸다.

남조군이 쌍류(雙流)를 함락함(111)

수주(巂州)의 정변절도를 해체하고 일곱 주를 서천에 돌려주었다.

이날 남조군이 성도(成都)성 아래 도착(120)

 

그 전날 노탐은 선봉유혁사 왕주를 파견하여 한주(사천성 광한시)로 가서 원군을 찾아 재촉하였다. 이때 흥원의 6천명과 봉상의 4천명은 이미 한주에 도착하였다.

그때에 마침 정변절도사였다가 도망한 두방은 충무, 의성, 서숙의 4천명을 가지고 한주로 도망왔다.

선봉유혁사 왕주는 흥원, , 간의 구원군 3천으로 비교(毗橋)에서 남조와 싸웠으나, 남조군 선봉에 패하여 한주(漢州)로 후퇴(124)

남조군()이 성도(成都)를 맹공격함(21) 이때에 돌장이 방어에 많은 공을 세웠다.

당 조정에서 파견한 전권대사 지상은 남조군과 화의를 하기로 약속하였다(23)

남조군이 군사를 거두고 화의를 청하였다(25)

남조군이 사신을 파견하여 지상을 영접하였다. 이때 지상은 원군이 곧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며 때를 넘겼다.

남만군은 화의하는 사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나아가 성을 공격하였다(28)

성도성에서 군사를내 보내 남조군을 쳤다(29)

 

정변절도사 두방의 벼슬을 깎아 강주사호로 삼고

안경복을 동천절도사로 삼아 촉을 원조한 여러 군대는 모두 안경복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동천절도사 안경복이 신도(新都)에 도착하니 남조군이 그를 막았다.(211)

남조군이 안경복과 다시 만났는데 안경복이 남조군을 대파하여 2천여 명을 죽였다(212)

만족의 군사 수만이 다시 도착하였는데 우무위상장군 송위가 충무의 2천여 명을 데리고 도착하여 같이 싸워 남조군을 대파, 죽은 사람이 5천여 명이 되니 성숙산(星宿山)으로 물러나 지켰다(213)

송위는 타강역으로 진군하였는데 성도와 30리였다.

남조가 양정보를 파견하여 지상에게 화의를 청하니 지상이 먼저 포위를 풀고 군사를 물리라고 하였으나 양정보가 돌아갔는데도 남조가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남조가 다시 화의를 청하였지만 성도에서는 어그러진 대답만하니 남조군은 성도를 더욱 급하게 공격하였다.(216)

 

당의 원조군이 성 아래 도착하여 남조군과 싸워 승천교(陞遷橋)를 빼앗자,

남조군은 공격도구 불태우고 후퇴(218)

성도에 먼저 도착하여 남조군을 깬 송위를 시기하여 안경복은 첩지를 보내 그의 군대를 빼앗고 한주로 돌아가게 하였다. 남조군은 쌍류(雙流)에 이르렀지만 신천수(新穿水)에 막혀 3일만에 다리 만들어 건넌 뒤 다리를 부수고 갔다. 남조군이 공주(邛州)를 포위하였으나 이틀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자 버리고 떠났다.

안경복은 옹문성(壅門城)을 쌓게 하고 해자와 녹각을 세우고 정사를 담당하는 기구를 만들어 나누니 남조는 이로부터 다시는 성도를 침범하지 않았다.

공로를 세운 자에게 전()3백민을 내게 하고 관직을 주니, 당의 기강이 크게 붕괴된 것

좌복야 조확을 진해절도사에 충임하였다.(3)

 

방훈의 잔여무리가 연(), (), (), () 사이에 흩어져 살았는데, 서주관찰사 하후동에게 그들을 불러 타이르게 하였다.(4)

공주자사 오행로를 서천유후로 삼았다.(520)

광주(光州)의 백성들이 자사 이약옹을 쫓아내니 이양옹은 신식으로 달아났다.(5)

 

태자소부 이교의 건의에 따라 서주(徐州)에 계속 관찰사 두어,

(), (), (宿) 3개주()를 통괄하게 하고,

사주(泗州)를 잘라내 회남절도에 예속시킴(625)

위박(魏博)절도사 하전호는 교만, 포학하여 군사들이 난을 일으켜 죽이고, 대장 한군웅을

추대하여 유후로 삼자, 당이 한군웅을 위박유후로 삼았다.(91)

유첨을 형남절도사에 충임하고 온장을 진주사마로 깎아내리니 온장이 한탄하며 죽었다(97)

유첨을 강주자사로 깎아내렸다(927)

서천유후 오행로를 서천절도사로 삼았다.(1025)

다시 서주(徐州)를 감화군(感化軍)으로 하고 절도사를 두었다(1119)

 

좌금오상장군 이국창(주야적심)을 진무절도사로 삼았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