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0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8, 7. 남조의 침공-15)

상 상 2017. 3. 22. 19:1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0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8, 7. 남조의 침공-15)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2: 당의 내부모습- 9

내 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869

서주행영도초토사 강승훈이 여러 도의 군사 7만 여명을 거느리고 유자(柳子)의 서쪽에 주둔하고, 신흥(新興)에서 녹당(鹿塘)까지 성벽과 보루가 이어지게 하였다.(8691)

 

서주의 병사가 사방을 나누어 수자리를 서니 성 안에는 수천명에도 이르지 못하자 방훈은 비로소 두려워 하였다.(1)

위박의 군대가 풍현()을 공격하자 방훈은 심복 장수를 파견하여 3천을 거느리고 두 마음을 가진 부하 맹경문을 도와 풍현을 지키게 하고 위박군을 공격하게 하여 선봉에 서게 하였다. 방훈이 맹경문을 속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팽성을 지킬 사람을 선발한다고 하자 맹경문이 즉시 팽성으로 달려갔다. 성에 도착하지 전에 방훈의 복병이 그를 잡아 13일에 맹경문을 죽였다.

 

방훈군이 해주를 노략질하였다. 해주를 지키는 병사들이 다리의 기둥을 잘라 떨어지지 않게 해놓았는데 방훈군이 지나다가 다리가 무너지자 복병이 일어나 몰살하였다.

방훈군 가운데 수주를 공격한 사말들은 다시 남도군에게 격파되어 죽고 잡힌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사주(泗州) 단련판관 신당이 절서 구원군을 가지고 회수(淮水)하류의 저지선 뚫고 사주성에 들어감

(127)

강승훈은 사타족 추장 주야적심으로 하여금 선봉에 서게 했는데 맹활약으로 방훈군 연파(2)

 

왕홍립은 부하 3만을 거느리고 강승훈을 격파하게 해달라고 요청, 방훈이 허락하였다.

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수수(濉水)를 건너 녹당채를 습격하였는데 사타족의 활약으로

왕홍립군이 대패하였다. 녹당에서 양성까지 시체가 50리에 널려있고 목을 벤 숫자가 2만여급이었다.(211): 녹당채(鹿塘寨)전투(211)

강승훈은 왕홍립을 격파하고 유자(柳子)를 압박하여 방훈군의 요주와 1달 동안 수십차례 싸웠다. 요주가 군사를 이끌고 물을 건너는데 강승훈군이 이를 치자 요주는 물러났고 강승훈 군이 이를 쫓아가서 유자(柳子)를 포위하였다. 큰 바람이 불어 사방에서 불을 놓으니 요주군은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사타가 정예의 기병을 가지고 이들을 도살하여 몰살하였다.(229) 요주가 숙주로 달아났는데 그 수장 양비가 그를 잡아서 참수하였다.

 

방훈이 요주가 몰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직접 나가 싸우는 문제를 논의 하게 하자 주중이 말하였다. “유자(柳子)는 지역적으로 중요하고 군사도 정예였으며, 요주는 용감하고 지모를 갖추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엎어져 죽었으니, 위험하기는 달걀을 쌓아 놓은 것 같으며 드디어 대호를 세우고 군사를 다 모아 사방으로 나가서 죽을 결심으로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술사 조군장의 건의에 방훈은 최언중과 감군 등을 죽였다(45)

그리고 방훈은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정장 3만을 선발하며, 천책장군 대회명왕이라 하였다.

한편 사주(泗州) 단련판관 신당은 다시 나가 양주와 윤주에서 쌀과 소금 2만석, ()13천민을 싣고 돌아와 두산에 도착함(48)

위박의 군사들은 누차 풍현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방훈이 이를 먼저 공격하려고 순사를 이끌고 서주를 떠났다(49), 방훈이 풍현에 도착하여 위박군을 격파함.

연해절도사 조상은 등현()을 포위하였는데 위박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연주(兗州)로 후퇴

새로 부임한 회남절도사 마거가 정예병 3만으로 사주(泗州) 구출,

418일 회수를 건너 중류에 이르고 바로 성의 서쪽 영채를 포위하고 불을 지르니 방훈군 이 대패하였고 참수한 것이 수천급이고 왕홍립은 죽고 오형은 물러나 서성을 지키니 사주의 포위망이 비로소 풀렸다.(4) : 7개월만임

420일 방훈이 풍현()을 출발하여 소현이 이르러 군을 합하여 5~6만이(23)

29일에 선봉이 유자에 도착하였는데 복병을 만나 패하여 달아났다.

방훈이 급히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갔으나 방훈이 거느린 사람들은 모두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평민이어서 강승훈군의 형세가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다 :

유자(柳子)전투(429)

 

강승훈이 급히 그들을 추격하라고 명령하니 방훈군은 스스로 밟고 쓰러진 시체가 수십리에 있었고 죽은 사람이 수만명이었다.

방훈은 겨우 수습한 3천을 데리고 팽성(彭城)으로 돌아갔고, 그 장수 장실로 하여금 제성역(第城驛)에 주둔하게 하였다.(4)

 

기주(沂州)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하비(下邳)를 포위하자 방훈이 정일에게 그곳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정일은 부하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5)

()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관찰사 최요를 쫒아냈다.(6).

중서시랑 서상을 형남절도사에 충임하였다.

 

회남절도사 마거가 사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호주(濠州)를 공격하여 초의(招義), 종리(鐘離), 정원(定遠)을 봅았다.

당 조정에서 위박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송위를 서주서북면초토사로 삼고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풍과 소 사이에 주둔하게 하여 연해절도사 조상은 군사를 이끌고 이들과 만났다.

강승훈이 임환에서 승리하여 죽이거나 붙잡은 것이 1만명이었는데 드디어 양성, 유무, 소수등에 있는 영채를 뽑았다. 연해절도사 조상은 등헌을 뽑고 풍과 패를 쳤다.(7)

기현() 강승훈군에 투항. 패현의 비장 주매가 조상에게 항복

방훈은 손장과 허길을 파견하여 각기 수천을 거느리고 진전유와 주매를 공격하게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강승훈은 이긴 기세를 타고 제성을 뽑고 숙주의 서쪽에 도착하여 성을 쌓고 지켰다.

방훈은 서주의 옛날 장수 장현임에게 서주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그의 무리 장유와 장실 등이 수만을 거느리고 강승훈군에 대항하였다.

장실은 방훈에게 편지로 강승훈군이 서주성에 있어 서방(西方)은 비어 있을 것이니 송, 박 근교를 치면 저들은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갈 것이니, 장군께서는 요해에 매복을 두었다가 앞에서 치면 저는 성안의 군사들로 그들의 배후를 칠 것이니 그들을 격파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라고 하였다.

 

강승훈이 성밖의 영채 불태웠으나 이길수 없었는데(827)

장현임이 숙주(宿州)성을 들어 강승훈에 투항하고(94)

장현임이 무리를 끌고 부리와 서주로 가게 해 달라고 하자 허락하였다.

장현임이 불을 질러 성이 함락된 것처럼 하고서 부리로 가니 부리에서 그들을 맞이하자

부리를 점령하고 다시 1만명을 얻어 북쪽 서주로 갔다.(95)

팽성(彭城)을 포위하고 방훈군을 회유하니 성문을 열고 장현임군을 받아들이니,

방거직과 허길은 무리를 인솔하고 자성(내성)을 지켰는데 해가 지자 장현임은 군사를 파견하여 방거직과 허길을 참수하니 나머지 무리들은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으며

방훈군에 적극적인 사람 수천명을 참수하니 서주는 드디어 평정되었다 : 팽성(彭城) 탈환

방훈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석산(石山)의 서쪽으로 나와 주변을 약탈.

방훈은 송주(宋州)를 습격하여 그 남쪽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자사 정서충이 북쪽 성을 지키고 있을을 알자 변수(汴水)를 건너 남족으로 가서 박주(亳州)를 노략질 하였다(96)

강승훈 8만군은 사타족 주야적심으로 하여금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했는데

박주에서 방훈을 따라 잡았다.

방훈이 군사를 이끌고 환수(渙水)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서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사타에게 압박을 받아 마시거나 먹을 틈도 없이 기현()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이곤이 다리를 파괴해 갈곳을 잃어 현의 서쪽에 이르렀는데 강승훈군이 크게 모여 멋대로 치니 방훈군이 죽은 것이 근 1만이고 나머지는 물에 빠져 죽었으며 항복한 사람은 겨우 1천명 뿐이었으며 방훈 역시 죽었다.(9)

방훈군이 있는 숙천(宿遷) 등 여러영채에서 모두 그들의 수장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서주서북면초토사 송위 역시 소현()을 빼앗았는데 오형은 홀로 호주()를 지켰다.(9)

 

장현임을 우위교대장군 아사대부로 삼았다.(10)

회남절도사 마거가 여름부터 겨울까지 호주(濠州)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지만 성을 포위하고 지켰다.

오형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 마거는 그를 쫓아 죽이거나 붙잡아서 거의 다 없어졌고 오형은 초의에서 죽었다(1017)

방훈의 난이 끝남.(8687~8691017)

강승훈을 하동절도사로 삼고 두도를 의성절도사로 삼았다.

당 의종은 사타(沙陀)족 주야적심을 하동도 운주(雲州)의 대동(大同)절도사·좌금오상장군으로 삼고, '이국창' 이라는 이름을 하사(10)

신당은 박주자사로 삼았다.

 

당 의종은 연회를 즐기며, 정사는 재상인 노암에게 일임

남조(南詔)2차 성도(成都)침공(86910~8702)

남조에서 사자 양추경을 파견해 동성을 풀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니 정변(定邊)절도사 이사망은 공로를 세우려 양추경을 죽였다. 서천대장은 이사망이 서천을 분열시킨 것 때문에 몰래 사람을 남조에 파견하여 들어와 노략질 하게 하였다.

 

당 조정은 이사망이 탐욕스러워 들어오게 하고 두방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남조왕 추룡은 그 나라를 기울여 수만군()으로 동용오부(董舂烏部)를 깨뜨렸다(10)

나아가서 수주(巂州)를 노략질하니 정변의 도두 안재영이 청계관(清溪關)을 지켰는데 이를 공격하여 안재영은 물러나 대도하(大渡河)의 북쪽에 주둔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활쏘기를

8일간 하였다. 남조군이 몰래 군을 나누어 설과를 넘어 목원천에서 당군 500명을 전멸시킴(11)

1214일에 남조군은 건위(犍為)를 함락시키고 릉주()와 영주(榮州)의 경계를 노략질 하였다. 며칠 뒤 남조는 남조군은 능훈사에 크게 모여 가주와 마주하였는데 자사 양민이 이를 막았다. 남조군이 몰래 물을 건너 당군을 협공하고 충무도장 안경사를 죽이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붕괴되고 양민과 장윤경은 달아났다. 1229일 가주를 함락하였다.

정변절도사 두방이 대도하에서 남만군을 막았는데 이를 돌파하자 충무와 서숙 두 군()이 진을 치고 이들에 대항하였으며 두방은 목을 매었다가 서주의 장수 묘천서가 풀어주고

묘천서는 안재영과 충무의 장수들과 나가 싸우는데 두방은 밤에 도주하였다.

3명의 장수들도 남만군을 공격하여 놀라게 한 후 도주하였다.

남조군은 전진하여 여(), ()를 함락시키니 두방은 다시 도강으로 달아났으며,

남조군은 텅빈 공()입성.

이에 당은 좌신무장군 안령복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원조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