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1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58, 7. 남조의 침공-25)

상 상 2017. 4. 14. 18:1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1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58, 7. 남조의 침공-25)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3: 비교연표- 7

남조

(신구당서 남만전 중 남조전)

(자치통감 등)

867

이듬해(867) 추룡이 양추경(楊酋慶)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죄수를 풀어준 것에 대해 사례하였다. 처음에 이사망(李師望)이 건의하기를 성도(成都)에서 남조에 관련된 일을 모두 처리하는데, 여러 날을 소비하여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공(), (), (), (), (), (), () 7주를 떼어 내어 정변군(定邊軍)으로 삼고, 절도를 세워 긴요한 일들을 처리하게 하면, 거리가 가까워 일의 처리도 신속할 것입니다.” 천자가 그렇다고 말하고 즉시 조서를 내려 사망(師望)을 절도사로 삼고 공주(邛州)에 치소를 두었다.

 

공주는 성도에서 겨우 5(: 1사는 30)의 거리이며 수주(雟州)는 최남단으로 공주에서 천리의 거리여서,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앞뒤가 서로 부응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망은 멋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이롭게 여겨 이러한 문제를 속이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재물을 모으고 쌓는데 한이 없었고, 사사로이 뇌물을 챙긴 것이 백만을 헤아렸다. 또 남조의 노여움을 야기하여 공을 세우고자, 이에 양추경등을 죽였다. 이미 병사들이 분노하여 장차 사망(師望)을 소금에 절여 분을 풀려 하였는데, 때마침 당 조정에서 소환하여 두방(竇滂)으로 교체하였다.

 

두방은 더욱 탐욕스럽고 더욱 법을 따르지 않아 잘못을 꾸짖고 벌주며 가혹하고 세세히 따지는 것이 사망보다도 심하였다. 당시는 아직 만역(蠻役)이 일어나지 않은 때인데도, 정변군은 이미 곤경에 처하였다.

위박유후 하전호를 위박절도사로 삼았다.(1)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입조하자, 그의 친척조카 장회심에게 승계케 함(2)

정해절도사 고병이 안남(安南)에서 옹주와 광주에 이르기까지 해로의 암초를 제거하여

조운이 막히지 않았다(2)

 

서천 변방의 6개부족- (), (), (), (), 물등(勿鄧), ()6개 만().

비농(卑籠)부락만 홀로 당에 협조하여, 이씨 성을 하사하고 자사로 삼았다.

서천절도사 유동은 6개 성()의 만족 토벌하고 참수한 것이 5천여급(2)

악공 이가급이 새로운 소리를 잘내어

3월 당 의종이 이가급을 좌위위장군으로 삼아 조확이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좆지않았다.

 

당 의종이 몸이 불편하여 신하들이 알현하는 일이 드물었다(4)

회주(懷州) 백성들이 가뭄을 하소연하자. 자사 유인규가 금하였더니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유인규를 내쫓자, 유인규는 달아나 마을 집에 숨었다. 백성들은 유인규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누각에 올라 북을 쳤는데 오래 되고서야 안정되었다(7)

 

선흡관찰사 양수를 깎아내려 단주사마로 삼았다(824)

 

당 의종의 병이 나았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