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3, 7. 남조의 침공-10)

상 상 2017. 3. 10. 18:19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3, 7. 남조의 침공-10)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2: 당의 내부모습- 4

내 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861

옹관(邕管)과 인근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안남(安南)을 구원하게 함(8611)

백민종을 봉상절도사로 충임하였다(2). 이 당시 사대부는 환관을 매우 미워함(2)

염주방어사 왕관을 안남경략사로 삼았다. 이때 안남도호 이호는 무주(武州)에서 토군을 모아 여러 만족을 공격하여 다시 안남(安南)을 빼앗았는데 조정은 그가 수비를 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여 담주사호로 깎아내렸다.(610)

남조의 침입

 

남조가 옹주(邕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킴(7)

두종의 건의에 따라 좌사랑중 맹목을 조제사로 삼아 아직 떠나지 않았는데 남조가 수주를 노략질하고 공래관을 공격하니 맹복은 가지 않았다.(7)

 

어사대부 정애를 산남동도절도사로 삼았다.(10)

862

장신을 하중절도사에 충임하였다.(1)

 

남조가 다시 안남(安南)에 침입하자 채습을 안남경략사로 삼고

, , , , , , , , 등의 도()에서 군사 각기 3만을 징발하여 채습에게 주어 이를 막도록하니 만족은 드디어 떠났다.(8622).

 

당 의종은 부처를 받들기에 너무 지나쳐서 정사에 게을리 하였다(4)

영남(嶺南)은 예전에 광, , , , 안남은 모두 영남절도사에 예속시켰는데 채경이 주문을 올려 영남을 나누어 양도(兩道)로 만들기를 청하니 그 말을 쫒았다.

 

광주(廣州)에 영남동도(東道)절도, 옹주(邕州)에 영남서도(西道)절도 설치(5)

계관(桂管)의 공(() 두 주를 나누고, 용관(容管)의 등(() 두 주를

옹관(邕管)에 예속시킴

영남절도사 위주를 영남동도절도사로 채경을 영남서도절도사로 삼았다.

안남경략사 채습이 여러 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안남에 있었는데.

채경이 시기하여 병사들을 본래의 도로 돌려보내라고 하자 조정이 그 말을 좆았다.

 

채습이 수병(戍兵)5천을 남기도록 요청했으나 거부됨

서주(무녕절도)에서 오만·방자한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온장을 내쫓았다.(7)

조정에서는 온장이 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온장을 빈녕절도사로 삼고

절동관찰사 왕식을 무녕절도사로 삼았다.(78)

 

예전 서천절도사였던 하후자를 좌복야로 삼았다.

무녕절도에는 이전에 6번의 군사반란이 있어 절도사를 내쫓았다.

절도사를 무녕절도사 왕식이 부임해 반란한 군사 수천명을 모두 죽였다.(8)

도둑의 잔당이 없어지면서부터 무녕이라는 도의 직위는 어려워지는 단계가 되었다.

무녕절도를 서주(徐州) 단련사로 강등시켜, 연해(兗海)절도에 예속시키고.

호주(濠州)를 다시 회남절도로 돌려보내고, 숙주에 숙사도단련관찰사를 두었으며

장수와 병사 3천을 두어 서주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연, , 에 예속시켰다. : 무녕(武寧)절도 철폐(828)

왕식을 무녕절도사로 삼는 동시에 서(), (), (), (宿)체치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영남서도절도사 채경이 폭정을 하다가 옹주 군사들에게 내쫒겨 등주로 달아나 거짓 칙서와 공토사의 인장으로 토군을 모아 옹주를 공격했다가 패배, 자결하도록 명함.

계관관찰사 정우를 영남서도절도사로 삼았다.

남조가 만족 5만을 인솔하고 안남(安南)에 침입,

안남도호 채습이 기급함을 알리니 형남, 호남 두 도의 병사 2천과 계관의 3천을 징발하여

옹주에가서 정우의 통제를 받도록 함.

 

영남동도절도사 위주의 건의에 따라 체습을 해문에 주둔토록 하고, 정우는 군사를 나누어 방비토록 함(11)

체습이 증원을 요구하자 산남동도 1을 다시 증파(12)

이때에 남조는 이미 교지(交趾)를 포위, 안남도호 채습은 농성하여 굳게 지켰으나 구원병은 도착할 수 없었다(12).

올말(嗢末)이 조공해 옴(862)

올말(嗢末)이란 토번에서 노복이라는 호칭, 토번 부유한 층에서 군사발동시 노복을 가지고 참전, 이래서 토번의 무리가 많았던 것.

논공열의 난(842)이후 노복들이 주인을 잃자, 서로규합 부락 만들어, (), (),

(), ·(), (), (), (), (), (), () 등의 주()에 산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