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4, 7. 남조의 침공-11)

상 상 2017. 3. 13. 18:5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4, 7. 남조의 침공-1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2: 당의 내부모습- 5

내 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863

남조가 교지(交趾)를 함락시켰으며 안남도호 채습이 죽었다.(86317)

형남, 강서, 악악, 양주의 장수와 병사 400ᅟᅧᆫ음 달아났다가 형남유후 원유덕을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와 교지 공격했다가 원유덕 등이 전멸

남조가 2번의 교지점령에 죽이거나·사로잡은 것이 15만명이었다.

남조의 장수 양사진 2만군()으로 교지(交趾)를 점거하자 계동의 이족과 요족은 모두 그에게 항복.(1)

 

이런 상황에도 당 의종이 노닐고 잔치하는데 절도가 없자 좌습유 유세가 절제를 상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1)

 

천웅군을 진주에 두고 성, , 위 세 주를 예속시켰고 왕안실을 천웅관찰사로 삼았다.(2)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번, 한의 군사 7천을 거느리고 양주에서 승리하였다고 보고(3)

 

남만이 우강을 노략질하고 옹주를 압박하자 정우가 스스로 무신에게 옹주를 맡겨달라고 하였다.

이에 의무절도사 강승훈에게 정우를 대신토록 하고 군사를 뽑아 데려 가도록 하였다.(3)

 

여러 도적들이 서주(엣 무녕절도)에 들어가 관리들을 죽이니 자사 조경이 그들을 토벌 평정함.

(418)

 

강승훈이 장안에 도착하여 그를 영남서도절도사로 삼고 형, , , , 4도에 군사 1만을 징발하여 그에게 주었다.(4)

용관(容管)을 철폐하여, 영남서도에 예속시키고, 다시 공(),·() 두 주()를 계관(桂管)에 예속시킴(513)

 

문하시랑 두심권을 진해절도사로 충임하였다.(526)

안남(安南)도호부를 철폐하고, 해문진(海門鎭)에 행교주(行交州)를 두었는데 송융을 행교주자사로 삼고 강승훈은 군의 행영을 관장토록 하였다.(6) 두종을 봉상절도사에 충임하였다.(6)

 

다시 해문진에 안남도호부를 두고 송융을 경략사로 삼아 산동의 병사 1만명을 징발하여 그곳에 진수하게 하였다.(7)

당시 강서·호남에서 군량을 운송하는 사람들은, 상강(湘江)을 거슬러 영거(澪渠.운하), 이수(漓水)로 들어가니 수고롭고 비용이 들며 어려워 여러 군대는 먹을 것이 모자랐다.(7)

진번석의 건의에 따라 복건(福建)에서 광주(廣州)로 해상운송을 했으나, 관리들의 횡포로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힘들어 하였다.(7)

 

영남동도절도사 위가가 만족이 옹주로 향할 것이니 군사를 용주와 등주에 나누어 주둔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8)

할힐사는 신하 합이난지를 파견하여 경적을 요구하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역서를 요구하도록 하였고 회골을 토벌하고 안서에서부터 모든 것을 당나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니 (당의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호도의 아들 영호호를 좌습유로 삼았다.(1015)

 

숙사(宿泗)관찰사를 폐지하고 다시 서주(徐州)를 관찰부로 만들어,

호주()·사주(泗州) 예속시킴(1112)

 

남조가 서천을 노략질 하였다(12)

864

경조윤 이빈을 소의 절도사로 삼았다.(1)

 

서천에서 보고하기를 남조가 수주를 노략질 하였는데 자사 유사진이 그들을 깨뜨리고

1천 여명을 잡았다고 하였다. 우신책(금군)의 군사 5천과 각 도()의 군사를 발동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119)

 

수주(巂州)에 신안(新安)과 알융(遏戎) 2개성 다시 축성.

용관경략사 장인을 겸구당교주사로 삼고 해문진의 병사를 보태어 25천명을 채워

장인으로 하여금 안남을 빼앗도록 하였다.(1)

 

형부상서 이복을 서천절도사로 삼았다.(212)

서천절도사였던 소업이 산남서도관잘사로 좌천되었다.(227)

 

강승훈이 옹주에 도착하니 만족의 노략질이 더 치열하였다. 이에따라 충무, 의성, 평로, ·

선무, 연해, 천평, 선흡, 절서 등의 8개도에서 군사를 징발 강승훈에게 주도록 하였다(3)

 

남조는 만족 6만을 인솔하여 옹주(邕州)로 진격하자 강승훈은 8개 도의 병사 1만을 파견하여 그것을 막았으나 5개 도의 병사 8천명이 모두 죽었고 오직 천평군의 군사만이 늦게 도착하여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강승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절도부사 이행소가 무리를 이끌고 해자와 목책을 만드니 남조가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천평의 소교가 병사 300을 거느리고 밤에 남만의 병영을 불사르고 500여명을 죽이니

남만이 크게 놀라 하루 사이에 포위를 풀고 떠났다. 강승훈이 마침내 군사 수천을 풀어

뒤쫓았는데 죽인 오랑캐가 300을 넘지 않았는데 조정에 남만을 대파하였다고 보고함.(3)

 

남만을 격파한 공로로 상받은 사람은 모두 강승훈과 가까운 사람들이고 남만의 병영에 불지를 장교는 한 계급도 승진시키지 아니하니 군대 안에서는 원망하고 화를 내었다.(4)

 

서천에서 보고하기를 양림(兩林)의 귀주(鬼主.수령)가 남조군()을 격파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고 함.(7)

남조의 보새성(保塞城)의 성사, 두수련이 여주에 가서 항복함(7)

 

영남동도절도사 위주가 강승훈의 행위를 알고 재상에게 편지를 써서 알리니

강승훈을 우무위대장군 분사로 좌천시키고, 장인을 영남서도절도사로 삼고 용관의 4개 주에 별도로 경략사를 두었다.

 

남조가 옹주가 비고 바닥난 것을 알고 다시 침공하지 않으니 장인은 군대를 전진시켜 안남을 빼앗지 않았다.

하후자가 고병을 천거하여 장인을 대신하게 하자, 고병을 안남도호 본관경략초토사로 삼고

장인이 거느린 병사를 다 그에게 주었다.

 

하후자를 하동절도사로 충임하였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