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창 2년(842) 겨울과 [회창] 3년(843) 봄에 회골 특근 방구차와 아돈녕의 두 부락, 회골의 공주 밀갈가돈 한 부락, 외상(外相:외재상) 제락고아질 한 부락, 그리고 아장대장(牙帳大將) 조마니 등의 일곱 부락 등 모두 3만 명이 차례로 유주에 항복을 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여러 도에 배치하게 했다. 특근 올몰사, 아력지, 습물철의 세 부락, 회골 상(相) 애야물홍순, 회골 상서 여형 등 여러 부락이 진무[군]에 항복하자 세 부락 수령에게 이씨 성을 내려주고 이름을 사충(思忠), 사정(思貞), 사혜(思惠), 사정(思恩)이라고 하며 귀의사(歸義使)로 임명했다. 특근 엽피고형이(特勤葉被沽兄李)의 두 부락이 남쪽으로 토번에게로 도망갔고, 특륵가질력의 두 부락은 동북쪽으로 대실위(大室韋)에게로 도망갔으며 특근 하물철이 동쪽으로 거란을 토벌하다가 전사했다. 회창 3년(843) 회골 상서 복고역이 유주에 와서 태화공주를 유주로 돌려보내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오개[가한]은 유주 경계로부터 80리 떨어진 곳에 영지를 지은 다음 그 친신 골육과 마니 지정(志淨) 등 네 명을 먼저 진무군에 들어가게 했다. 이날 밤 하동[절도사] 유면이 군대를 이끌고 오개[가한]의 영지에 몰래 [쳐들어]가자 오개[가한]이 놀라 동북쪽으로 약 4백 리나 밖으로 도망가 화해실위에 의지해 영지를 지었는데, 태화공주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풍주자사 석웅의 군대가 태화공주의 천막과 만날 수 있어 맞이해서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상 구당서 회홀전> [회창 2년(842) 겨울과 3년(843) 봄에] 특륵방구차와 아돈녕 등의 네 부락과 장군 조마니 부락의 백성 [일곱 부락의] 3만 명이 [장]중무에게 투항하자 올몰사도 사자를 보내 귀순을 표시했다. 황제가 가한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고자 했으나 가한이 이미 운주를 공격해 유면과 싸워 패배를 했다. 올몰사가 세 부락과 특근, 대추(大酋)가 2천 기를 이끌고 진무[군]에 투항을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올몰사를 우금오위대장군으로 책봉하고 회화군왕이라 작을 내린 다음 천덕[군]을 귀의군(歸義軍)으로 하고 [그를] 귀의군[절도]사로 배수하고, 아력지를 영변군공(寧邊郡公), 습물철을 창화군공(昌化郡公), 오라사를 영삭군공(寧朔郡公)으로 [작을 주고], 또한 관군대장군 좌위위대장군으로 삼았고, 애사물을 영새군공(寧塞郡公)으로 [작을 주고] 우령군대장군으로 삼았다. 더해 올몰사에게 아장의 기치[牙旗], 표범의 꼬리, 칼과 그릇[刀器 등] 여러 물자를 내려주고 그 속관에게도 관과 요대를 주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재상 [이]덕유에게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이래 귀화했던 충성스럽고 뛰어난 자를 대저 30명 뽑아 『이역귀충전(異域歸忠傳)』을 지어 그들에게 내려주라고 했다. 올몰사가 그의 가족이 태원에 머무르며 이끌고 있는 형제들과 천자를 위해 변방을 지킬 것을 청하자 황제가 유면에게 명해 운[주]와 삭[주] 사이에 집을 지어 그 가족을 살게 했다. 가한이 사자를 보내 군대를 빌려 원래의 아정이 있었던 곳을 돌아가고자 하며 또한 천덕성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가한이 화를 내며 대동천(大同川)으로 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돌려서 운주를 공격하자 자사 영벽이 감히 나가지 못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여러 진의 병사를 징발해 태원 이북에 주둔하게 했다. 올몰사 등이 조정에 오자 모두 이씨 [성을] 내려 올몰사를 [이]사충(李思忠), 아력지를 [이]사정(李思貞), 습물철을 [이]사의(李思義), 오라사를 [이]사례(李思禮), 그리고 애사물을 [이]홍순(李弘順)이라고 하고 귀의군부[절도]사에 배수 했다. 이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유면을 회골남면초무사(鶻南面招撫使), 장중무를 동면초무사(東面招撫使), [이]사충을 하서당항도장(河西党項都將)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로 삼고, [유]면에게 안문[현](鴈門縣: 산서성 대현)에 둔영하라고 했다. 또한 조칙을 내려 은주자사(銀州刺史) 하청조와 울주자사(蔚州刺史) 계필통에게 번(蕃)과 혼(渾)의 군대를 이끌고 진무[군]을 나아가 [유]면과 [장]중무와 연합해 회골을 조금씩 핍박하게 했다. [이]사충이 여러 차례 깊이 들어가 그 부하들을 항복하게 회유하자 [유]면은 사타의 병사를 나누어 사충을 돕게 하고 하중군(河中軍: 산서성 영제시 서남쪽 포주진) 은 기병 5백으로 [이]홍순을 돕게 했다. [유]면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운주에 이르고, [이]사충이 보대책(保大柵: 보대군이 위치한 성채. 보대군은 섬서성 황릉현 동남쪽)에 주둔해서 하중과 진허(진주와 허주의 경계에 위치한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회골과 교전을 벌여 패배했다. 이듬해(843년) 또한 [이]홍순에게 패배를 했다. [유]면과 천덕행영부사 석웅이 용감한 기병과 사타, 계필 등의 여러 다른 족속을 정돈해 밤에 운주를 나가 마읍[군](馬邑郡: 치소, 지금 산서성 삭주시)까지 말을 달려갔다가 안중새(安衆塞: 산서성 삭현 동북쪽 마읍에 위치)에서 회골과 만나 싸워 [회골을] 대패시켰다. 오개[가한]이 바야흐로 진무[성]을 압박하며 힘차게 말을 몰아 들어왔다가 밤에 성벽에 판 구멍에 숨어 있었던 정예 병사가 튀어 나오자 오개[가한]이 놀라 물러나 갔고, [석]웅이 북쪽으로 쫓아 살호산까지 가자 오개[가한]은 부상을 입고 도망했다. [풍주자사 석]웅이 [태화]공주를 만나 공주를 모시고 돌아오자 특근 이하 백성 수만 명이 항복을 했고, 짐수레와 물자, 그리고 내려준 조서 등을 모두 거두어 들였다. [오개]가한이 나머지를 거두어 흑거자(黑車子: 화해실위의 추장?)에게로 가서 의지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이]홍순, [하]청조에게 끝까지 쫓게 했다. [이]홍순이 흑거자를 많은 재물로 유혹해 오개[가한]을 죽일 것을 도모했다. 이전에 [오개]가한을 따라 망명한 사람들이 [궤멸되어] 군대를 조직하지 못했고, <이상 신당서 회홀전> (무종 회창 3년(843년) 정월, 회골의 오개가한(15대 가한)이 무리를 인솔하고 진무(振武)에 침입하여 압박하자 유면이 인주자사 석웅과 도지병마사 왕봉을 파견하여 사타의 주야적심 세 부락과 글필과 탁발의 3천 기병을 인솔하고 그 아장을 기습토록 하고, 유면은 스스로 대군을 가지고 그 뒤를 이었다. 석웅은 진무에 도착하여성에 올라 회골의 무리들이 적은 것을 바라보는데 전거 수십 승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붉고 푸른 색의 옷을 입어 한족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 간첩을 시켜서 그것을 묻도록 하니 말하였다. “공주의 장입니다.” 고석웅이 간첩으로 하여금 그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공주께서 여기에 도착하셨는데 이곳은 집안이니 응당 돌아오실 길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곧 병사를 내보내어 가한을 치려고 하니 청컨대 공주께서는 은밀히 시종과 서로 보호하고 수레에 머물러 계시면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석웅이 마침내 성을 파서 10개의 구멍을 만들고 군사를 이끌고 밤에 나가서 곧바로 가한의 아장을 공격하였는데 그 장 아래에 도착하니 오랑캐가 마침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한은 크게 놀라고 어떻게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치중을 버리고 달아났고, 석웅은 뒤를 쫓아 그를 공격하였으며 경자일(11일)에 회골을 살호산에서 대파하였는데 가한은 상처를 입고 수백병의 기병과 더불어 달아나니 석웅은 태화공주를 영접하여 돌아왔다. 경술일(21일) 오개가한(15대 가한)이 달아나 흑거자족((黑車子族)을 지켰는데 그들의 무너졌던 병사들은 대부분 유주에 가서 항복하였다. 3월, 유면이 주문을 올렸다. “귀의군에 속한 회골 3천여 명과 추장 43명을 조서에 의하며 여러 도에 나누어 예속시키자 모두 크게 소리치고 군영을 연결시켜서 호타하를 점거하고 명령을 좆지 않으려고 하여 이미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회골사람 가운데 유주에 항복한 사람은 전후로 3만명인데 모두 분산시켜 여러 도에 예속시켰습니다.” <이상 자치통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