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회골에는 (재)상 적심(赤心)이란 자가 있어 그와 지위가 같은 상(相)이었고, 복고라는 성을 가진 자와 특근 나힐철이 부락 백성을 이끌면서 오개[가한]을 따르지 않았다. 적심이 장성을 범하려고 하자 오개[가한]이 그 예하의 온몰사를 먼저 보내 천덕군사(天德軍使) 전모에게 성의를 표한 다음에 적심 재상을 오개가한에게 알현하도록 유인해 적심과 복고 두 사람을 가한의 아장 아래에서 죽였다. [하지만 특근]나힐[철]은 싸움에서 이겨 적심 예하의 7천 장(帳)을 모두 점유하고 동쪽으로 진무[군](振武軍), 대동[군](大同軍)을 엿보며 실위(室韋), 흑사[적](黑沙磧), 유림(楡林) 웅무군(雄武軍)의 서북쪽 경계까지 쳐들어왔다. 유주절도사 장중무가 동생 [장]중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특근] 나힐[철]의 무리를 격파하고 7천 장 모두를 거두어들인 다음에 잡힌 사람들 중에서 노약자 9만 명 가까이를 살육했다. [특근] 나힐[철]도 화살에 맞아 낙타 무리 속에 뛰어들어 잠시 [위기를] 벗어났으나 오개[가한]에게 잡혀 죽었다. 오개[가한:15대 가한]의 여러 부락이 여전히 10만 명이라고 칭하며 아장을 대동군 북쪽의 여문산에 두었는데, 이때가 회창 2년(842) 가을로 [그들이] 빈번히 동섬(東陝)의 이북을 위협하자 천덕[군], 진무[군], 운삭[군](雲朔軍)이 늘 빈번하게 [포로로] 잡히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여러 도의 병사들 모두를 방어에 참가하게 하면서 하동절도사 유면을 남면초공회골사(南面招控迴鶻使)로 임명하고, 유주절도사 장중무를 동면초공회골사(東面招控迴鶻使)로 임명했다. <구당서 회홀전> 이듬해(842년) 회골이 군주를 모시고 고비 남쪽으로 와서 운[주](雲州)와 삭[주](朔州)를 공격하고 횡수(橫水)를 약탈해서 죽고 약탈당한 백성이 아주 많게 되었고, 천덕[군](天德軍)과 진무[군] 사이를 왕래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가축을 약탈했다. 이에 [조정에서] 각 도의 병사를 소집해 연합해서 토벌하게 했다. 올몰사는 적심이 심하게 간사해 통제가 어렵게 되자 몰래 천덕[군]의 변방 장수 전모와 약속을 하고 적심을 아장에서 불러 죽였다. 나힐철은 적심의 백성 7천 장을 거두어 동쪽으로 진무[군](振武軍)과 대동[군](大同軍)으로 도망해서 실위와 흑사[적](黑沙磧),[그리고 유림(楡林)]에 의지해 남으로 유주(幽州)를 엿보자 절도사 장중무가 격파하고 그 백성을 모두 잡았다. 나힐철이 도망가다가 오개[가한]에게 잡혀 죽었다. 그러나 오개[가한:15대 가한]의 군대는 여전히 강해 10만 명이 된다고 하며 대동[군] 북쪽 여문산(閭門山)에 있는 아장에 머물러 있었다. <신당서 회홀전> 당 무종 회창 2년(842년) 2월 정축일(12일) 이후, 회골이 다시 주문을 올려서 식량을 요구하고 토욕혼과 당항이 약탈한 것을 찾아 따지고 또 진무에 있는 성을 빌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내사 양관을 파견하여 가한에게 편지를 내리고 성을 빌려 줄수 없다고 타이르면서 나머지는 사리에 맞게 조치하도록 하였다.(금오상장군 이충순을 진무절도사로 삼았다.) 3월 경신일(25일)-이후, 장작소감 묘진을 파견하여 오개가한(15대 가한)을 책명하게 하였는데 서서히 가도록 하면서 하동에서 머무르게 하여 가한의 위치가 정해지도록 기다린 후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나 가한이 변경을 자주 침입하고 시끄럽게 하니 묘진은 끝내 가지 못하였다. 회골의 올몰사는 적심이 교활하여 알기 어려운 까닭에 먼저 전모에게 알리어 적심이 변방을 침범하기를 꾀한다고 하고 마침내 적심을 유혹하여 복고와 나란히 죽이자 (특륵) 나힐철이 적심의 무리 7천장(帳: 세대)을 거두어가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4월 갑신일(20일), 올몰사는 그 나라의 특륵과 재상 등 2,20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항복하였다. 5월 무신일(14일), 올몰사를 좌금오대장군 회화군왕으로 삼고, 그 부락의 무리에게 쌀 5천곡과 비단 3천필 내렸다. 나힐철이 그의 무리를 인솔하고 진무와 대동으로부터 동쪽으로 가서 실위와 흑사(黑沙)를 경유하고 남쪽으로 웅무군을 향하면서 유주를 엿보았다. 노룡절도사 장중무는 그의 동생 장중지를 파견하여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맞서 치도록 하여 그들을 대패시키고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이루다 헤아릴수 없었으며 그 7천장(帳)을 다 거두어 항복시키고 여러 도(道)에 분배하였다. 나힐철은 달아났으나 오개 가한이 그를 잡아서 죽였다. 이 당시에 오개(15대 가한)의 무리가 비록 쇠약해지고 줄었으나 아직 10만이라고 불리고, 아장을 대동군(大同軍) 북쪽 여문산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6월 갑신일(21일), 올몰사가 거느리는 것을 '귀의군(歸義軍)'으로 삼고, 올몰사를 좌금오대장군으로 삼아·군사에 충임하였다. 7월, 오개가한이 다시 그의 재상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군사를 빌려 나라를 되찾는데 돕도록 하고, 또 천덕성을 빌려달라고 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8월, (오개)가한은 무리를 인솔하고 파두봉의 남쪽을 지나 대동천大同川)으로 갑자기 들어와서 하동의 여러 오랑캐와 우마(牛馬) 수만을 몰아서 노략질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싸우다가 운주(雲州) 성문에 도착하였다. 자사 장헌절이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고, 토욕혼과 당항은 모두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그들을 피하였다. 8월 경오일(9일)에 조서를 내려서 진, 서, 여, 양양 등에 있는 병사를 발동하여 태원과 진무, 천덕에 주둔하도록 하고, 봄이 오기를 기다려 회골을 몰아서 내쫓도록 하였다. 정축일(16일), 올몰사는 그의 동생인 아력지, 습물철, 오라사 모두에게 성을 하사하여 이씨로 하고 이름을 (이)사충, (이)사정, (이)사의, (이)사례로 하였으며, 그 나라의 재상인 애야물의 성을 애로 하고 이름을 (애)홍순으로 하였으며 애홍순을 귀의군부사로 삼았다. 9월, 유면에게 초무회골사를 겸하도록 하여 만약 몰아서 내쫓아야 한다면 각 도의 행영군사를 임시로 지휘토록 하고, 장중무를 동면초무회골사로 삼고 해당 도의 행영병과 해, 거란, 실위 등을 나란히 스스로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사충(올몰사)를 하서당항도장과 회골 서남면초토사로 삼았는데 그 모두를 태원에서 군대를 모으게 하였다. 유면으로 하여금 안문관(雁門關)에 주둔하게 하였다. 하동, 유주, 진무, 천덕에 조서를 내려 각기 대병을 내보내도록 하고 병영을 옮겨 조금씩 전진하여 회홀을 압박하였다. 이사충은 글필(契苾), 사타(沙陀), 토욕혼 출신의 6천 기병과 세력을 합쳐서 회골을 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을사일(14일) 은주자사 하청조와 울주자사 글필통으로 하동의 번병을 나누어 거느리게하고 지눔에 가서 이사충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11월 기미일(29일), 유면과 장중무는 혹한으로 군사를 나가게 할수 없으므로 새해 초까지 기다리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진무절도사)이충순만이 홀로 이사충과 함께 전진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12월 병인일(7일), 이덕유가 주문을 올려서 이사충(올몰사)을 파견하여 보대책(保大柵)으로 나아가 주둔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좆았다. 정묘일(8일) 이후, (진무절도사)이충순이 주문을 올려서 회골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고 하였다. <이상 자치통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