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책봉의 진실(4)

상 상 2016. 10. 31. 17:46

책봉의 진실(4)

 

3) 회홀의 4대 가한(무의성공가한)

 

그런데도 당나라는 7806월 회홀의 가한(군주)를 또다시 책명하고 있다.

 

구당서 회홀전을 계속 보면,

돈막하[달간]은 스스로 즉위해 합골돌록 비가가한 이라고 부르고 그 추장 []건달간을 시켜 []문수를 따라 조정에 [들어]오게 했다. [황제가] 경조윤 원휴에게 부절(符節)을 갖고 가 무의성공가한(武義成功可汗:4대 가한)으로 책명하게 했다.(頓莫賀自立號為合骨咄祿毗伽可汗使其酋長建達干隨文秀來朝命京兆尹源休持節冊為武義成功可汗)

라고 되어있다.

 

위에 있는 구당서 회홀전에는 날짜가 없는데,

이때가 7806월이다. 그 근거는 구당서 덕종 본기이다.

건중원년(780) 6월 을묘일경조윤 원휴가 회흘에 사신으로 가서무의성공가한을 책명하였다. 원문): 建中元年 六月乙卯京兆尹源休使迴紇冊武義成功可汗

<구당서 권12, 덕종 본기() 건중 원년(780)>.

 

자치통감을 봐도

당 덕종 건중 원년(780) 6, .....(상략) 등리(登利)가한은 듣지 않았다. 돈막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남쪽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틈을 타서 병사를 일으켜 그를 쳐서 살해 하고 9성 호족 2천 명을 합병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합골돌록 비가가한(4대 가한)이라고 부르고 그의 신하인 율달간과 양문수를 모두 보내 들어와 알현하면서 번신이 될 것을 원하며 머리카락을 풀어 늘어뜨리고 다듬지 않은 채 책명을 기다렸다. 을유일(22) 경조소윤 임장사람 원휴에게 명하여 돈막하를 무의성공가한(4대 가한)으로 책명하도록 하였다.(六月...(상략)登裡不聽頓莫賀乘人心之不欲南寇也舉兵擊殺之並九姓胡二千人自立為合骨咄祿毘伽可汗遣其臣聿達干與梁文秀俱入見願為籓臣垂發不翦以待冊命乙卯命京兆少尹臨漳源休冊頓莫賀為武義成功可汗)

라고 되어 있어 7806월에 회홀의 새로운 가한을 책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어떤 시기인지 알아보자.

 

776에 토번의 고홍 등 4개 절도(節度) 및 돌궐, 토욕혼, , (), , 당항 등 20여만 무리가 당나라에 쳐들어왔는데

검남절도사 최녕이 이를 격퇴하였으며

 

777년에 토번이 당나라의 방주쪽으로 또 쳐들어왔으며(9)

778년에는 회홀이 병주와 대주쪽으로 쳐들어 왔고,

토번은 당나라의 영주 염주 경주를 유린하고 돌아간 뒤,

남쪽으로 남조 병사 20만과 연합하여 무주, 부주, 문주, 여주, 아주를 공략하였다.

 

779, 당 덕종이 즉위하자 토번과의 전쟁을 중지시키고 사신을 교환하며 평화로 방향을 틀고,

회홀에 대해서도 대종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다시 과거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홀의 모우가한이 바로 거국적으로 남하해 당나라의 상사를 빌미로 장차 공격을 하고자 했다.

이때 그 나라 재상 돈막하달간이 모우가한을 죽이고 합골돌록 비가가한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779년 당 덕종이 즉위하면서 그동안의 전쟁을 종식하고 토번과 회홀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한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회홀에 우호관계를 구축하려다가 모우가한이 반대하였는데

당나라에 우호적인 돈막하달간이 모우가한을 죽이고

회홀의 합골돌록 비가가한이 되자 그와 우호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것이 합골돌록 비가가한을 무의성공가한으로 책명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때 여기서 책봉이란 우호관계 구축 또는 우호관계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책봉이 종속관계나 지배통치 관계 및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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