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39, 삼국사기 신라 본기 -28 (44대 민애왕 본기)

상 상 2015. 9. 30. 17:2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39, 삼국사기 신라 본기 -28 (44대 민애왕 본기)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 삼국사기 신라 44대 민애왕 본기 >

민애왕

 

 

0 (AD 838) :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민애왕(閔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원성대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어,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임금이 되었다.

죽은 아버지를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존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貴寶夫人)

선의태후(宣懿太后)라 하였으며,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允容王后)라 하였다.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서 청해진에 들어가 우징(祐徵)을 찾아뵈었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하였다. “김명(金明)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利弘)은 임금과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다. 바라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서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 궁복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지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드디어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그의 친구 정년(鄭年)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고서는 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김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맞서 싸우게 하였는데,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보내 기병 3천 명으로 돌격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상하게 하였다.

 

[원문]

[주석1]哀王 立 姓金氏 諱明 元聖大王之曾孫也 大阿湌忠恭之子 累官爲上大等 與侍中利弘 逼王殺之 自立爲王 追諡考爲宣康大王 母朴氏 貴寶夫人爲宣懿太[주석2]后 妻金氏爲允容王后 拜伊湌金貴爲上大等 阿湌憲崇爲侍中 二月 金陽募集兵士 入淸海鎭 謁祐徵 阿湌祐徵在淸海鎭 聞金明簒[주석3]位 謂鎭大使弓福曰 金明弑君自立 利弘枉殺君[주석4]父 不可共戴天也 願仗將軍之兵 以報君父之讎弓福曰 古人有言 見義不爲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遂分兵五千人 與其友鄭年曰 非子 不能平禍亂冬十二月 金陽爲平東將軍 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 統軍 至武州鐵冶[주석5]縣 王使大監金敏周 出軍迎戰 遣駱金·李順行 以馬軍三千突擊 殺傷殆盡

 

 

2 (AD 839) : 이찬과 대아찬에게 명하여 군사를 막도록

[번역문]

2(839) 봄 윤 정월에 밤낮 없이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언덕에 이르렀다.

왕은 군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억훈(嶷勛)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도록 하였다. 또 한번 싸움에 크게 이기니, 왕의 군사는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은 서쪽 교외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좌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군사들이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원문]

二年 春閏正月 晝夜兼行 十九日 至于達伐之丘 王聞兵至 命伊湌大昕 大阿湌允璘·嶷勛等 將兵拒之 又一戰大克 王軍死者過半 時王在西郊大樹之下 左右皆散 獨立不知所爲 奔入月遊宅 兵士尋而害之 羣臣以禮葬之 諡曰閔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