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37, 삼국사기 신라 본기 -26 (42대 흥덕왕 본기)

상 상 2015. 9. 23. 17:43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37, 삼국사기 신라 본기 -26 (42대 흥덕왕 본기)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삼국사기 신라 42대 흥덕왕 본기 >

흥덕왕

 

0 (AD 826) :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흥덕왕(興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이 수종(秀宗)이었는데 나중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겨울 12월에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하였다.

왕이 [왕비] 생각을 잊지 못해 슬픔에 싸여 즐거워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글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였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차마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환관뿐이었다.

<장화(章和)는 성이 김씨이고 소성왕의 딸이다.>

 

[원문]

興德王立 諱秀宗 後改爲景徽 憲德王同母弟也 冬十二月 妃章和夫人卒 追封爲定穆王后 王思不能忘 悵然不樂 羣臣表請再納妃 王曰 隻鳥有喪匹之悲 况失良匹 何忍無情遽再娶乎遂不從 亦不親近女侍 左右使令 唯宦竪而己 章和姓金氏 昭聖王之女也

 

 

2 (AD 827) :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번역문]

2(827) 봄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헌덕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정을 폐지하고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서 조문·제사하고, 왕을 이은 임금을 책립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使持節) 대도독 계림주제군사(大都督 雞林州諸軍事) 겸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大妃)로 삼았으며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았다.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 나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여름 5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8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永恭)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원문]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唐文宗聞王薨 廢朝 命太子左諭德兼 御史中丞源寂 持節吊祭 仍冊立嗣王 爲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使持節 大都督 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 母朴氏爲大妃 妻朴氏爲妃 三月 高句麗僧丘德入唐 䝴經至 王集諸寺僧徒 出迎之

夏五月 降霜 秋八月 太白晝見 京都大旱 侍中永恭退

 

3 (AD 828) : 정월에 대아찬 김우징을 시중으로 삼았다.

[번역문]

3(828) 봄 정월에 대아찬 김우징(金祐徵)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눈이 세 자나 내렸다.

여름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張氏)인데,<일명 보고(保皐)라고도 하였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본국으로 돌아와 왕을 찾아 뵙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淸海)를 지켰다.<청해는 지금[고려]의 완도(莞島)이다.> 한산주 표천현(瓢川縣)의 요망한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빨리 부자가 되는 술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홀렸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옳지 않은 도[左道]로써 여러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자를 벌하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라 하고는 그 사람을 먼 섬으로 쫓아 버렸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麟德殿)에 불러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매우 성행하였다.

 

[원문]

三年 春正月 大阿湌金祐徵爲侍中 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雪深三尺 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 一名保臯 入唐徐州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 淸海 今之莞島 漢山州瓢川縣妖人 自言有速富之術 衆人頗惑之 王聞之曰 執左道以惑衆者 刑之 先王之法也投畀[주석1]其人遠島[주석2] 冬十二月[주석3]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4 (AD 829) : 2월에 당은군을 당성진(唐城鎭)으로 삼고

[번역문]

4(829) 2월에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삼고 사찬 극정(極正)을 보내 가서 지키게 하였다.

 

[원문]

四年 春二月 以唐恩郡爲唐城鎭 以沙湌極正往守之

 

5 (AD 830) : 4월에 왕이 병환이 났으므로 기도를 드리고

[번역문]

5(830) 여름 4월에 왕이 병환이 났으므로 기도를 드리고 아울러 15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원문]

五年 夏四月 王不豫祈禱 仍許度僧一百五十人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6 (AD 831) :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번역문]

6(831)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시중 우징(祐徵)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 윤분(允芬)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왕자 김능유(金能儒)를 승려 아홉 명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조회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진봉사(進奉使) 능유 등 일행이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원문]

六年 春正月 地震 侍中祐徵免 伊湌允芬爲侍中 二月 遣王子金能儒幷僧九人朝唐 秋七月 入唐進奉使能儒等一行人 廻次溺海[주석4]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7 (AD 832) : 가물어 초목이 말라 죽은 빈땅이 되었으므로,

[번역문]

7(832) 봄과 여름에 가물어 초목이 말라 죽은 빈 땅[赤地]이 되었으므로,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지 않고 평상시에 먹던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7월에 비가 내렸다. 8월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자로 하여금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원문]

七年 春夏旱 赤地 王避正殿 減常膳 赦內外獄囚 秋七月 乃雨 八月 飢荒 盜賊遍起 冬十月 王命使安撫之

 

8 (AD 833) : 큰 기근이 들어 왕이 시조묘를 배알

[번역문]

8(833) 봄에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에 왕이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다.

11월에 시중 윤분(允芬)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원문]

八年 春 國內大飢 夏四月 王謁始祖廟 冬十月 桃李再華 民多疫死 十一月

侍中允芬退

 

9 (AD 834) : 정월에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번역문]

9(834) 봄 정월에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서형산(西兄山) 아래 거둥하여 군대를 크게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 나아가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면서 늙은이와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아이,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원문]

九年 春正月 祐徵復爲侍中 秋九月 王幸西兄山下大閱 御武平門觀射 冬十月 巡幸國南州郡 存問耆老及鰥寡孤獨 賜穀布有差

 

10 (AD 835) : 2월에 아찬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번역문]

10(835) 2월에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글을 올려 관직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명(金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원문]

十年 春二月 拜阿湌金均貞爲上大等 侍中祐徵 以父均貞入相 表乞解職 大阿湌金明爲侍中

 

11 (AD 836) :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번역문]

11(836)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숙위하게 하였다. 여름 6월에 살별[星孛]이 동쪽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달을 침범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고, 조정에서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合葬)하였다.

 

[원문]

十一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遣王子金義琮如唐 謝恩兼宿衛 夏六月 星孛于東 秋七月 太白犯月 冬十二月 王薨 諡曰興德 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