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선생이 쓰신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삼조선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1. 신조선
1) 신조선과 부여의 관계
조선상고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冒頓)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 년경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즉, 신조선 → 부여 →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 인지,
신조선 →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 인지 고증할 방법이 없으나
흉노 모돈 사건과 동, 북부여의 분립 시기를 보아 나중의 설이 맞는 것 같다고 하심.)
2) 신조선의 변천(조선 상고사 내용을 요약한 것임)
부여가 동부여와 북부여로 분립되고
동부여에서 고구려가 떨어져 나와 독립하며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의 공격으로)
동부여는 동북부여(지금의 훈춘지방에 도읍)와 동남부여(지금의 함흥지방에 도읍)로 나뉘었다가
동북부여는 대무신왕때 고구려에 통합되고
동남부여는 문자왕(文姿王) 3년(기원 494 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위 내용은 삼국사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본기와 대무신왕(제 3대 왕) 본기,
문자명왕(제 21대 왕) 본기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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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부여가 동부여와 북부여로 분립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본기)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
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② 동부여에서 고구려가 떨어져 나와 독립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본기)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淥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금와]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淹㴲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淥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
<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③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의 공격으로 동부여는 동북부여(지금의 훈춘지방에 도읍)와
동남부여(지금의 함흥지방에 도읍)로 나뉘었다가
동북부여는 대무신왕때 고구려에 통합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 -제 3대 왕, 본기)
대무신왕 4년(서기 21)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요!”
[왕은]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은밀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대무신왕 5 년 (AD 22) : 2월에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랬다.
3월에 신비로운 말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④ 동남부여는 문자왕(文姿王) 3년(기원 494 년)에 고구려에 병합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문자명왕 - 제 21대 왕, 본기)
문자명왕 3년(494)
2월에 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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