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년 (AD 194) :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진휼하였다
[번역문]
16년(서기 194년)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쳐서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질양으로 사냥 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신은 가난하고 궁해서 항상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올해 흉년이 들어 품 팔 데가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으므로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왕은 말하기를
“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런 극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다.”고 하고는 옷과 음식을 주어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 늙어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 구휼하게 하였다.
[또]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를 때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 대여(賑貸有差)하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례(恒例)로 삼게 삼았다.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19 년 (AD 197) : 중국에서 난리가 나, 투항해 오는 자가 많았다
[번역문]
19년(서기 197년)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이 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고국천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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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여기에는 큰 사건이 없습니다. 주요한 일이,
1) 이른바 ‘진대법’과
2) 중국에서 큰 난리가 나서 한나라 사람들이 투항해오는 자가 많았다는 이야기,
3) 왕호를 고국천원에 장사 지냈다고 하여 고국천왕이라고 한 일 정도입니다.
1) 고국천왕 16년(서기 194년) 때의 일처럼 고구려에서는 백성들이 굶주릴 때, 관의 곡식을 진휼대여 하였다고 하여
고구려에서는 ‘진대법’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학교에서 배웠던 일이 생각납니다.
2) 한나라 건안 2년이면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 때이고, 서기로는 197년입니다.
이때 조조는 헌제를 허도로 데려와서 권력을 장악한 시기이고,
유비는 서주를 차지하고 있다가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던 때이며
원술이 이해 봄에 황제를 칭했다가 조조에게 대패 한 때입니다.
즉, 후한이 붕괴되고 중국이 갈라져서 서로 제각기 싸우던 매우 혼란한 시기여서
많은 전쟁이 벌어지는 등 많은 난리를 만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에 투항해왔던 것 같습니다.
3) 왕호문제
왕이 죽어서 고국천원에 장사 지냈다고 해서 왕호를 고국천왕이라고 했다는 왕호 작명법은
제4대 임금인 민중왕 때부터 시작되어, 5대 모본왕에 이어 지금 9대 고국천왕이 세 번째입니다.
앞으로도 고구려의 많은 임금의 왕호를 장사지낸 곳의 이름을 따서 왕호로 삼습니다.
이러한 예는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왕호 작명법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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